착한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이웃사랑
착한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이웃사랑
코로나 19에 대한 공포는 여전하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有始有終)는 공자의 말씀도 멀게 느껴진다. 방역당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2단계, 2.5단계로 늘려가면서 감염 확산을 막으려 하지만 쉽지가 않은 모양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전염병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과 공포,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극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도 담아냈다. 공무원과 의료인, 신부와 기자 등 모든 직종의 사람들이 페스트로부터 도시를 지키려는 헌신과 봉사정신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헌신으로 페스트는 종식됐다.
그러나 카뮈는 마지막 문장에서 예언과도 같은 말을 남긴다. “그 균은 수십 년간 살아남았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 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을 몰아넣어 그곳에서 죽게 할 날이 온다.”고 말이다. 그 교훈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인간의 욕망과 탐욕과 연결된 생태환경의 파괴라든가 그에 따른 기후위기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되지는 못했다.
문득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내 생각을 멈췄다. 소설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말을 거역하고 벌을 받아 세상에 내려온 천사 미하일이다. 그는 구두공으로 6년을 일했다. 그동안 하나님이 깨닫도록 지시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다시 천사가 돼 천국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다. 그 질문가운데 하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질문의 답은 사랑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실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교회 주일학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신약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자 한 율법교사가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반쯤 죽은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사제와 사제 족에 속하는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쳤다. 이 두 사람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나 제사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길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하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보살펴 줬다. 사마리아인은 선민사상을 갖고 있는 유다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던 이방인이었다. 바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 사람은 신앙심이 깊은 사제나 레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사도 바오로는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신 이 한마디 말씀에 요약 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종교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회의 직분 담당자들은 자비로워야 하고, 사람들을 책임지며, 이웃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일으켜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며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코로나 19 확진자가 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교회의 목사도 확진 판정을 받아 16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부의 방역정책이 사기극이라고 주장한다. 순교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최근의 외신들은 이 교회 신도들의 확진사태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일부의 극우적인 이단 교회의 행태로 코로나19 유행기간 동안 비대면 예배 등 공중 보건과 신앙 사이의 균형을 지켜온 대다수 교회까지 덩달아 이미지 추락 피해를 보고 있다"고도 했다. 일부에서는 교회의 예배를 가능한 비 대면으로 해 달라는 방역당국의 요청에 종교탄압이라고 억지 주장을 펴기도 한다. 서울의 그 교회뿐 아니라 지역 곳곳의 교회에서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속수무책인 코로나19 상황에서 대면 예배로 인한 확진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배의 형식을 다소 바꿔 달라는 요청이 과연 종교 탄압일까. 기독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그럼에도 코로나 19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국민을 외면하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체 지나갔던 사제이거나 레위인과 다를 바 없다.
지난 광복절에 있었던 보수단체들의 서울 광화문집회는 코로나19의 재확산 사태를 불러왔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집회 참석을 유도하는 문자를 보낸 곳도 서울의 그 교회였다는 보도도 놀랍다. 보수단체들은 또 다시 다가올 개천절에 그런 집회를 열겠다고 벼르고 있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고사성어의 뜻이 새롭다. 우리 민족의 축제인 추석을 앞두고 방역당국이 비상이다. 코로나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과 이웃을 위해 자중자애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의 추석이었으면 좋겠다.
<김건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