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언론인칼럼

시간을 멈추고 새로운 문명에 대비할 때

제주한라병원 2020. 5. 28. 16:22



시간을 멈추고 새로운 문명에 대비할 때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거리감, 쉼표 때문입니다.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말과 말 사이에 적당한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쉼 없이 달려온 건 아닌지. 
 내가 쉼 없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돌아봐야 합니다.”

 

 

문득 혜민스님이 떠올랐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스님은 이 책에서 잠시 멈춰보자고 말을 걸었다. 과거를 반추하거나 불안한 미래를 상상하는 마음을 현재에 멈춰놓고 숨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그렇게 항상 급하게 어디로 가다보면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서울에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다. 제주라는 공간과 시간을 떠나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과 사람들의 새로운 시각을 만나면서 스님의 글에 참으로 공감했었다.


코로나19로 제주사회는 물론 온 세상이 멈췄다. 학교가 멈춰 섰고, 공항과 호텔, 도서관도, 체육관도 문을 닫았다. 경제가 꽁꽁 얼어붙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단어가 우리 주변을 채웠다. 일상에 지친 우리네 감성을 일깨우던 문화예술도 자취를 감췄다. 우리가 멈추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를 멈추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재물과 권력에 어두워진 눈을 씻고 세상과 사람을, 우리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는 묵시는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시간을 잠시 멈추고 제주사회를 바라본다. 개발이라는 장밋빛 슬로건을 내세워 무참히 도려내고 파헤친 제주의 자연,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바다 깊은 곳에선 고기들의 신음 소리가 숨비소리 만큼이나 처량하게 들려온다. 제2공항을 짓는다느니 말아야 한다느니 논쟁은 끝이 없고, 짓다 만 휴양단지나 한라산을 가로막고 하늘 높이 치솟는 드림타워를 놓고도 걱정이 많다. 보배 같은 송악산에 짓겠다는 뉴 오션 타운을 놓고서는 이웃사람끼리 찬반 논쟁이 한창이다. 거리를 메우던 외국인 관광객은 사라졌고, 문 닫은 가게도 한 둘이 아니다. 애써 지은 농산물은 판로가 막혔다. 양식장에서 갓 올려낸 싱싱한 광어들은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라는 생소한 판매방식으로 팔린다. 아픔은 아픔대로, 갈등은 갈등대로 남은 채 변화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멈춰진 제주의 시간은 개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변화를 깨닫게 하는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개발을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는 정책을 만들고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물론 개발과 보전의 양립이라는 화두는 80년대 이후 제주사회에서 언제나 중심이 됐다. 그럼에도 개발은 이뤄졌고 자연은 파괴됐다. 코로나19 이후의 제주사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제주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될지도 모른다.


많은 학자들이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를 지배했던 ‘글로벌화(Globalization)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팬데믹(Pandemic) 공포에 세계 각국은 빗장을 걸어 잠갔다. 보호무역주의와 자국중심주의의 대두는 개방경제와 자유무역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 경제에 위기의 심각한 요인이 될 뿐 아니라, 국제자유도시를 꿈꾸던 우리에겐 치명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지금은 코로나 이후 제주에 맞는 새로운 기준이나 표준, 이른바 뉴 노멀(New Normal)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인구의 30%가 목숨을 잃었고 전통사회가 무너졌다. 흑사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교회는 절대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봉건영주 체제의 경제는 도시자본제로 바뀌었다. 이때 인간성이 중시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르네상스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코로나19 역시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보잘것없이 보였던 바이러스 하나가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세계 경제를 멈추게 하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경악하고 있다. 절대 권력처럼 보였던 21세기 첨단 과학기술이나 경제 시스템에 대한 회의를 가져 왔다. 반 강제적으로 사회적 격리를 겪으면서 지금의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의 태동처럼 인류사의 대 변혁을 가져올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예고하는 이유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온라인 수업이라든가 재택근무 등 비대면 서비스가 강조되는 언택트(Untact), 인터넷을 통해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스마트 플랫폼(Smart Platform), 첨단기술과 감성이 만나는 인공지능(AI Personal)등이 모든 산업과 영역에 적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40여 년 전 앨빈 토플러가 ‘제 3의 물결’을 통해 예고했던 일들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은 우리의 일상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바꿀 것이다.


그야말로 변혁의 시기이다. 이때 필요한 리더십은 소통과 창의력, 그리고 용기이다. 비대면 소통은 대화의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창의력과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제주도정의 정책을 결정하고 심의하는 고위 공직자나 지방의회 의원들은 이러한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한 문제는 제주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노동문화의 변화로 일자리에도 타격이 될 것이고, 도민소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명산업이라 할 수 있는 농업과 관광 등 산업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화도 예상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기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혜민스님의 말을 떠 올린다. 아무리 우리들의 삶이 바뀌고 천지개벽 같은 변혁이 이뤄진다 해도 “내가 옳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행복한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또 그렇게 코로나 19 이후의 시대를 준비할 수 있다면, 멈춰진 시간은 신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로 기억될 것이다.

 

 

<김건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