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제주 민가에선 귀한 존재… 경제력 있어야 보유

제주한라병원 2020. 2. 10. 16:08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22> 화북 와가



제주 민가에선 귀한 존재… 경제력 있어야 보유




집은 무엇일까. 삶을 누리는 최소한의 공간일 수도 있지만, 최정점의 삶을 누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나저나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제주의 집은 뭘로 표현될까. 제주도라고 하면 흔히 제주초가만 있는 걸로 안다. 초가가 대세이긴 했지만 기와를 얹는 와가도 분명 존재했다. 와가와 초가는 지붕을 얹는 재료의 차이에 있다. 제주초가에 얹는 ‘새’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만큼 재료를 구하기 쉬웠다. 그렇지만 ‘새’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기와는 오래간다. 기능적 측면에서 자주 교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와는 ‘새’와 달리 자연에서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가능했다. 때문에 제주사람들에겐 눈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게 와가였다. 즉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가 뒷받침 되어야만 와가를 보유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의 기록인 <삼군호구가가총책>이라는 자료를 들여다보면 제주도내에 모두 171개 마을이 나오는데, 와가를 보유한 마을은 15개 마을에 불과했다. 와가를 많이 보유한 마을은 제주성 안에 있던 일도동과 삼도동을 들 수 있고, 육지부와 이동이 가능했던 포구를 보유한 조천과 화북 등도 와가의 비율이 높았다.


제주도는 섬이다. 해상을 통해 오가야만 했다. 해상을 오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한데, 조천과 화북 등의 지역에서 직접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생기고, 상인들도 활약을 하게 된다. 조천과 화북은 선각자들도 많이 등장한다. 다른 지역과 이동이 잦으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되고, 많은 걸 들여오게 된다. 특히 제주도는 200년간 출륙금지 상태였는데, 그게 풀리게 되면서 조천과 화북 등의 마을은 제주의 핵심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화북 와가도 그런 집단의 부류였다. 배를 만드는 집안이었다. 현재 화북 와가는 ‘김석윤 와가’로 불린다. 김석윤씨는 제주에서 활동하는 원로 건축가이다. 김석윤씨는 김건축의 대표인데,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배를 만드는 일에 종사를 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의 아들은 사업을 했다고 전한다.


△ 사람들이 김석윤 와가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업을 한 그분은 김석윤 대표의 할아버지가 된다. 포목상도 했고, 해운업에도 투자를 하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런 경제적인 바탕이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제주 근대의 걸출한 인물로 청탄 김광추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김광추 선생은 김석윤 대표의 아버지이다. 그는 다방면에서 출중했다. 뛰어난 서예가였고 사진가였고 화가였다. 예술의 거의 모든 부문에 능했다. 청탄 김광추 선생은 서울 배재고에 들어가서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조선 최고의 조각가인 김복진, 미술비평가인 안석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배재고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각을 익힌다. 귀국을 할 때는 카메라와 서예도구, 서양화구, 화훼집 등을 들고 온다. 그때가 1932년이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고 1936년 귀국하고 나서 줄곧 문화예술활동을 한다. 1942년엔 사진공모전에서 입상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카메라는 손에 쉽게 쥐기 힘들었다. 당시 카메라 가격은 200원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예술가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경제 여력이 문제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청탄 선생은 예술을 즐길 바탕은 됐던 셈이다. 그런데 청탄 김광추 선생에게 4·3이 불어닥친다. 제주의 모든 사람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게 4·3이다. 청탄 선생도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도 김광추 선생은 주위의 도움을 받아서 피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 출신 사회주의자 가운데 유명한 분으로 김문준이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을 많이 하는데, 그분의 유해를 일본에서 제주로 모셔온 분이 바로 김광추 선생이었다. 김문준의 유해를 제주로 모셔온 건 일제강점기 때 일이지만, 사회주의자 유해를 모셔왔으니 어땠을까.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경계 대상이 된 청탄 선생은 4·3 당시 구속된다. 구속 이유는 김문준 유해를 우리나라로 봉환했다는 것과 화북독서회 사건이 엮였다. 구속된 건 제주4.3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다행히도 청탄 선생은 그의 아버지와 당시 제주신문사 사장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고, 곧바로 광주로 피신을 한다.


청탄 선생은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나 그의 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잡혔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풀려나긴 했으나 형무소에서 얻은 병으로 죽고 만다. 청탄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