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도시
순례자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도시
스페인 부르고스
마드리드에서 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2시간 남짓 달려가면 아를란손 강 연안에 있는 부르고스에 이른다. 우리에게 조금 낯선 도시이지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도시이자 잠시 쉬어가는 순례길의 오아시스이다.
해발 850m, 인구 18만 명의 작은 도시 부르고스는 884년 알폰소 3세 때부터 1074년까지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수도였을 만큼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또한, 1936부터 4여 년간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장군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곳이며, 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 엘 시드 장군이 탄생한 곳이 바로 부르고스이다.
◇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의 모습.
이처럼 스페인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였지만, 1492년 1월 이사벨 여왕이 스페인을 통일하면서부터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중심지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성 야고보의 영혼이 묻힌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부터 부르고스는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고색창연한 중세풍의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산타 마리아 문이 눈에 들어온다. 14세기에 건축된 이 문은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12개의 문 중 하나로 대성당과 함께 부르고스를 상징한다. 성문 맨 위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이 도시를 대표하는 6명의 조각상이 장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부르고스에 태어나 이슬람 군대와 맞서 싸운 지략가 엘 시드 장군의 조각상이 하단 맨 오른쪽에 자리한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과 같은 엘 시드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의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이고, 카스티야의 왕 산초 2세 때 총애를 받았으나, 산초에 이은 알폰소 6세 왕의 미움을 받아 카스티야레온 왕국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그는 평생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스페인 각지를 떠돌며 이슬람교도와 싸워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결과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그 도시의 영주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공적은 살아있을 때 받지 못하고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재평가를 받았다.
현재 부르고스에는 엘 시드와 관련된 흔적들이 꽤 많다. 발렌시아에서 그의 유해를 모셔와 부르고스 대성당에 그의 아내, 히메나와 함께 매장돼 있고, 이 도시 입구인 산타 마리아 문에 흉상이 있고, 프리모 데 리베라 광장의 말 동상 등 엘 시드와 관련된 조각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12개의 성문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산타 마리아 문을 지나는 순간 마법처럼 엄청나게 높은 고딕 양식의 대성당 탑이 눈에 들어온다. ‘건축학의 보고’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부르고스답게 대성당은 이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성당은 세비야, 톨레도에 이어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이다.
스페인 고딕 건축의 최고의 걸작을 평가받은 부르고스 대성당은 1221년 페르난도 3세 때 마우리시오 주교에 의해 건립됐으며, 16세기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300여 년에 걸쳐 건축된 대성당은 기본이 되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에 독일과 프랑스 건축 양식이 추가됐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활동했던 수많은 예술가의 열정과 부르고스 시민들의 신앙심이 위대한 건축물을 완성했다.
◇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르고스 대성당.
대성당 내부에는 13개의 예배당이 있고, 이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콘테스타블레 예배당의 금세공은 대성당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주었다. 이 예배당 안쪽의 작은 방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다빈치의 작품을 만날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대성당에서 환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와 다양한 신상들, 그리고 아름다운 문양들을 보고 나면 발길은 자연스럽게 대성당 앞에 있는 페르난도 광장으로 이어진다. 부르고스 여행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 되는 광장은 언제나 현지 사람들과 여행자들로 넘쳐난다. 그리 큰 규모의 광장은 아니지만, 노천카페에 앉아서 아름다운 대성당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해 질 무렵이면 많은 사람이 광장 주변으로 모여들어 다양한 거리 공연을 보며, 시원한 음료나 맛있는 스페인 요리를 먹으면서 황홀한 저녁 시간을 보낸다. 한마디로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 바로 페르난도 광장이다.
이 광장과 대성당 사이에 난 칼레 팔로마 거리는 부르고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거리의 폭은 그리 크지 않지만 거리를 따라 카페, 레스토랑, 호텔, 기념품점 등이 들어서 있다. 이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대성당 주변의 중세풍 건축물과 달리 형형색색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대부분 건축물은 모두 테라스가 있다. 유럽의 건축물에서 보기 힘든 양식으로 쿠바나 터키 등 이슬람 문화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팔로마 거리를 따라 약 1km 남짓 이어진 테라스 건축물들은 이색적인 부르고스의 모습을 연출한다.
◇ 테라스가 인상적인 칼레 팔로마 거리의 건축물들.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면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크고 작은 동상을 많이 만나게 된다. 군인 동상, 노부부 동상, 할아버지와 손자 동상, 신문 보는 동상, 엘 시드 동상 등 다양한 형태의 동상들이 뒷골목과 거리에 세워져 있다. 무슨 이유로 동상을 많이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엘 시드 동상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인이 동상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골목과 광장 그리고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재미있는 동상을 만나는 것도 부르고스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재미이다.
만약 도시 전체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아름다운 팔로마 거리를 등지고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옛 성터로 올라가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말 그대로 옛 성터는 성곽의 망루 몇 개를 제외하면 터만 남아 있다. 붉은 지붕 위로 솟아오른 대성당의 종탑과 영원히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망루에서 시내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것도 좋고, 페르난도 광장이나 마요르 광장 그리고 팔로마 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좋다. 중세의 도시, ‘부르고스’라면 지도 한 장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다니는 것이 이 도시를 가장 재미있고, 행복하게 보내는 여행 방법일 것이다.
◇ 도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미라도라 전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