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이 만들어지다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5>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
사람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이 만들어지다
오현 이야기를 좀 오래 끌었다. 어떤 이들은 고리타분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성리학이다, 유학이다, 선비 등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그렇다. ‘고리타분하다’라는 단어를 뜯어보면 “신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새롭지 못하고, 답답하다는 말도 그 단어에 내포돼 있다. 그렇다면 썩 좋은 뜻은 아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만 본다면 조선시대 이야기는 ‘고리타분하다’는 말이 맞겠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있을 수 없다. 성리학으로 대변되는 조선을 모르고서 지금의 역사를 논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쓰는 글도 고리타분에 속한다면 속하겠다. 성리학자와 연관되는 이야기로, 오현단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 될테니.
제주시 봉개동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봉개동은 5개 마을로 나눠진다. 봉개 본동이 있고, 본동을 중심으로 남서쪽은 용강동, 남동쪽은 명도암, 북동쪽에 동회천과 서회천이 있다. 이들 마을 중 명도암을 좀 둘러보자.
명도암은 절물자연휴양림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절물휴양림에서 북쪽으로 4·3평화공원을 거쳐 바닷가를 향해 더 내달리면 명도암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명도암은 고이지라는 인물이 처음 정착을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명도암은 고이지와는 관계가 없고, 고이지 손녀사위와 인연을 지닌다. 바로 김진용이라는 인물이다. 김진용은 앞서 오현단을 설명할 때 등장한 인물이다. 오현단 경내에 귤림서원을 만들기 전에 장수당이라는 교육시설이 있었다. 장수당은 제주목사 이괴가 세웠고, 김진용이 장수당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장수당의 실질 교장 역할을 김진용이 하게 되는데, 마을 이름인 명도암은 그의 호였다. 한 사람의 호가 마을 이름이 된 드문 사례이다.
명도암이라는 마을은 사람 이름과 연관돼 있기에, 김진용과 관련된 전설도 많이 내려온다. 사실 김진용은 봉개동 출신은 아니다. 구좌읍 한동리 출신인데, 고이지의 큰아들인 고경봉의 딸과 결혼을 해서 명도암에 정착을 한다. 명도암은 김진용이라는 인물 덕분에 학문이 발달하게 되고, 제주도내 여러 마을에서 학문을 배우러 명도암까지 오갔다고 한다.
김진용과 관련된 인물로 간옹 이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초를 당하고, 제주에 유배를 온다. 그때가 광해군 10년인 1618년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 다시 중앙으로 복귀를 하는데, 그는 제주에 5년간 머물면서 김진용 등에게 가르침을 줬다고 한다. 당시 김진용의 나이는 13세였고, 이후 과거에 급제한 뒤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그만두고 고향 제주에 내려온다.
김진용은 공부를 위해 열정을 불사른 인물로 전설에 나온다. 전설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어느 날 김진용은 처가로 향한다. 처가에서 차려준 밥을 먹게 되는데, 자신만 유독 차별이다. 다른 동서들은 쌀밥을 받았는데, 자신의 밥상만 보리밥이 봉긋 오른 밥상이지 뭔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처가를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아내에게 불만을 털어놓는다.
“왜 내 밥상만 보리밥인가요.”
그러자 아내가 이유를 설명한다.
“다른 사위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벼슬을 하니까 쌀밥을 주고, 당신은 가난한 촌 선비니까 보리밥이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만들어낸 이야기일테지만, 김진용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전설을 통해 읽는다.
김진용은 그 설움을 떨치기 위해 책상머리에 솥을 매달아 놓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솥을 매달아 두니 정신을 차리지 않고 공부를 하다가 솥에 이마를 부딪히곤 했다. 그만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했다는 점을 전설은 깨우치고 있다.
이야기는 더 있다. 자신의 제자 2명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제자 한 명은 어사가 되어 제주에 오고, 한 명은 제주목사로 제주에 오게 된다. 이야기를 다 하게 되면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제주목사로 내려온 어사 이야기만 해본다.
김진용이 세상과 이별을 고한 뒤에 그의 제자가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그가 스승을 찾아갔으나 이미 이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덤을 찾아 가보았는데, 묘자리가 좋지 못했다. 제주목사는 대체 누가 묘를 썼는지 알아보라고 했고, 묘자리를 본 인물이 고전적이라는 사람으로 확인된다. 목사는 왜 묘를 그렇게 썼는지 따졌고, 고전적은 생전에 섭섭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묘자리를 이상한 곳에 쓰게 된 이유였다.
고전적의 이야기를 다 들은 목사는 김진용의 묘자리를 다시 보려고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서귀포시 홍로라는 곳에 다다르자 제주목사가 고전적을 향해 판단을 해보라고 한다. 고전적은 제주목사가 앉은 곳을 바로 지목한다.
김진용의 묘는 현재 명도암에 없다. 그의 부인 묘는 명도암에 있지만 그는 가족과 떨어져 있다. 묘는 없으나 김진용 사후 360년 기념으로 현재 안세미오름 북쪽 기슭에 유허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 안세미오름 북쪽 기슭에 있는 명도암 선생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