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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힘 가져도 법의 공정한 잣대 벗어날 수 없어

제주한라병원 2019. 3. 28. 15:05

역사 속 세상만사 - 이집트 이야기 ⅩⅩⅤ, 정의로운 판결 ③ -


권력·힘 가져도 법의 공정한 잣대 벗어날 수 없어



며칠째 이어진 쿠나누프의 법정진술에 대해 대서기 메리텐사는 파라오의 명령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흐뭇해하고 있었다. 진술이 다 끝나면 메리텐사는 아무런 말도 없이 퇴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속사정을 알지 못한 쿠나누프는 메리텐사의 반응에 매우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욕심 많은 지방 관리 넴피나크트는 이 광경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농부는 매일매일 법정에 나와 진술을 계속했다. 대서기는 듣기만 할 뿐 도무지 판결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9일째 되던 날, 쿠나누프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자기가 가족들에게 남겨놓고 온 식량이 지금쯤 거의 바닥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라오가 이미 충분한 식량과 돈을 그의 가족들에게 보낸 것을 알 리 없는 쿠나누프는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마지막 열흘째 되는 날 아침, 쿠나누프는 오늘도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법정으로 향했다. 그는 대서기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정의의 신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악을 피하소서. 정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이름은 현세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내세에서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정의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원한 힘이니까요.”


농부가 이렇게 말하고 대서기를 올려다보니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아무런 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농부는 슬프게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던 분이 이제는 장님이 되었군요. 옛날에는 모든 것을 잘 들으시던 분이 이제는 귀머거리가 되었군요. 9일 동안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한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신들에게 당신에 관해 불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쿠나누프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서 법정을 걸어 나가자 메리텐사는 경비들을 시켜 그를 다시 법정으로 데려왔다. 쿠나누프는 자신의 비난에 화가 난 메리텐사가 이제 자신을 벌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온다 해도 목마른 사람이 마시는 한 잔의 물과 같을 뿐이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법정을 올려다보는 쿠나누프에게 메리텐사가 열흘 만에 처음으로 웃어 보이지 않는가. “착한 농부여, 겁내지 말라.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정의의 판결을 들어라.”


쿠나누프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한 서기가 앞으로 나오더니 두루마리 파피루스를 펼쳐 9개의 연설을 읽어갔다. 그 연설은 바로 쿠나누프 자신이 9일 동안 진술한 말과 한 마디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재판장 메리텐사는 말했다. “자, 이제 나와 같이 파라오의 궁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그는 파라오 누부카우레 앞에 당도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키스를 했다. 파라오는 농부가 행한 정직하고도 웅변적인 연설을 읽고 매우 감동했다.


메리텐사가 파라오와 쿠나누프가 있는 자리에서 판결을 읽으니 잠시 후 그 판결에 따라 공포에 질린 넴피나크트가 파라오 앞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채찍으로 온몸을 맞은 후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재판장 메리텐사는 넴피나크트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여 쿠나누프에게 주고 넴피나크트는 먼 곳으로 추방토록 했다. 부자가 된 농부 쿠나누프는 자신의 고향 파이윰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수천년 전 이집트에서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이 정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승을 부리면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요즘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버닝썬 사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관련 의혹, 고(故) 장자연 사건 등을 돌아보면 한결같이 권력과 금력있는 자들의 범죄의혹이 과거 힘의 논리나 권력의 비호로 유야무야 되었던 어두운 우리사회의 치부들이다. ‘공정한 법’이라는 잣대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또는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논리 속에 희생되고 외면되어온 서글픈 우리의 초상인 것이다.


만시지탄의 아쉬움이 크긴 하지만 이제라도 명명백백히 여러 의혹들의 잘잘못을 가려 억울한 죽음이나 피해가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게 하고, 더불어 아무리 권력과 힘을 가진 이들이라 해도 법의 공정한 잣대를 벗어난 횡포나 범죄를 저질렀을 때 추상같은 정의의 본령이 세워지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장학재단 부산센터장 안대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