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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자”

제주한라병원 2019. 2. 25. 17:40


"세상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자"


‘생(生)’과 ‘몰(歿)’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영원할 것 같은 태양·지구도 마찬가지 운명

몰이 슬픈 이유는 마주한 ‘영원한 이별’ 때문

 

삶에 가장 큰 걱정은 병 못 고쳐 죽는 것

설령 천당 못가더라도 “문제가 안 될 것”

나와 비슷한 수준의 영혼들이 맞이해줄 터



2019년 2월 현재 지구촌의 인구는 76억8466만명이다. 하루에 출생자가 38만3381명, 사망자가 16만82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초침이 한번 ‘째깍’하는 사이 지구촌엔 4.4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그리고 그 ‘순간’에 1.9명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지구는 1억 3993만명 출생과 5870만명 사망의 통계를 매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출생자 수가 사망자 수를 매년 크게 웃돌면서 지구촌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유엔 경제사회국(United Nations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이 2017년 발표한 ‘세계 인구 전망’에 따르면 지구촌 인구는 매년 8300만명 정도가 증가하면서 2030년에 86억명, 2050년 98억명에 이어 2100년에는 112억명에 도달할 전망이다.


지금도 인구가 많다고 아우성인데 100억명을 넘어서는 인구를 지구가 감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도 한다. 지금껏 과학이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의 우려(憂慮) 대부분을 기우(杞憂)로 만들었던 것처럼 지구촌 인구 100억명 시대에도 과학에 희망을 걸어본다.


식품과 위생 등 생활환경이 크게 좋아지고 의료까지 발전하면서 장수하게 된 것도 인구 증가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이젠 65세도 청년인 세상이다. 유엔은 2015년 초 생애주기별 연령지표를 새롭게 발표했는데 ‘청년’이 18세에서 65세까지다. 0~17세는 미성년, 그리고 66~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으로 규정했다.


우리 정부가 ‘노인’으로 규정하는 기준 나이 만65세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도입 당시인 1964년과 비교해 생활 여건이 너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나이에 0.7을 곱한 것이 실질적 생체 나이라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70세 나이에 0.7을 곱해 신체나이 49세의 삶을 살든 100세에 장수노인 반열에 들든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삶을 즐기고 있고, 내 후손이 태어나서 기쁜 것은 내가 갈 차례가 되어간다는 의미이다. 교차하는 삶과 죽음이 인생인 것이다. 죽음은 슬픔이지만 큰 틀의 자연에서 보면 생(生)과 몰(沒)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영원할 것 같은 우주도 마찬가지다. 과거 선조들이 ‘신’으로 숭배했던 태양도, 우리가 터를 두고 살고 있는 ‘우주의 푸른 별’ 지구도 ‘생’했으니 당연히 ‘몰’을 앞두고 있다. 다만 그 시간의 단위가 우리네 인간과 조금 다를 뿐이다.


태어난 지 50억년 가량되는 태양은 현재 ‘청년기’이나 지나온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에너지를 다 쓰고 난 뒤 백색왜성으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지구는, 화성궤도까지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태양에 삼켜질 운명이다.


생과 몰은 우리네 삶의 이야기다. 당연히 그러한 줄 알면서도 ‘치사하게’ 정에 이끌리는 인간이다. 생을 맞이할 때는 한없는 기쁨을 표한다. 아름답지 않은 새 생명이 없다지만 ‘우리의 아이’이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그만큼 ‘몰’에 대한 슬픔도 크다. 모든 생명이 소중해 그 누구의 죽음도 안타까운 게 인지상정이다. 특히 그 대상이 가족이면 슬픔의 무게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신 슬픔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다’며 천붕(天崩)이라고 했다.


몰이 슬프고 안타까운 또 하나의 이유는 ‘영원한 이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죽음으로써 더 이상 같이할 수 없다는 게 명확해진다.


세상에 아쉽지 않은 이별이 없다. 그래도 다시 만날 가능성을 믿으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군대 가는 아들과의 이별은 제대 후 만남이 확실하기에 품을 떠나는 게 안쓰러울 뿐 아쉬움은 덜하다. 외국으로 아주 이민을 가는 친구도 막연하지만 살아있으면 언제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위안에 웃으며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는 이별은 다르다. 더 이상 만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원한 이별이다. 함께 못할 시간이 그립고, 더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다.


임종을 맞는 순간 마지막 눈을 감기 전까진, 우리는 매일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는다. 똑같은 눈을 감더라도 잠을 잘 때는 ‘내일 아침에 눈을 뜰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언젠가는 막연한 확신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임종에 이르러선 다를 것이다. 앞으로 깨어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눈을 감기가 싫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과의 영원한 이별, 이승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 같다.


그래서 죽음은 안타깝다.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도 어찌 보면 그리 행복하지만도 않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지만 결국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덤’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셈이다.


하지만 얼마 전 지인의 ‘조언’을 듣고 난 뒤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한가?’와 ‘그렇지 못한가?’다. 건강하다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건강하지 못하면 ‘고칠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관건이다. 고칠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고칠 수 없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선 ‘천당이냐?’ ‘지옥이냐?’의 문제가 기다린다. 그런데 여기선 “어느 쪽이든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천당에 가면 정말 다행이고, 지옥에 가더라도 자신과 ‘등급’이 비슷한 수준의 사람(또는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자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풀릴 수 있으면 백번 심각해질 필요가 있겠으나 세상일들이 내가 걱정한다고 풀려주질 않는다. 너무 심각해지면 스스로와 주변이 불편할 뿐이다.


이를테면 깨진 도자기를 붙잡고 아무리 심각하게 굴어보아도 결코 깨지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 사고로 도자기 조각을 치우든,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하든 대책을 강구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을 듯하다.



<김철웅 전 제주매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