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이 아닌 사람들
제주사람들과 더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죠
새로 쓰는 제주이야기 <10>오현이 아닌 사람들
제주와 관련이 되는 인물 가운데 ‘오현’으로 배향되어 모셔지는 인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다. 그건 당시 시대의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유림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을 했다. 조선시대 서원이라는 곳은 사립 교육기관이다. 당시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이 지금의 사학과는 다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서원을 오가는 이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게 된다. 그들의 입김이란 즉, 유학자들의 생각과 많이 교감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이약동의 사례를 보면 서원에 배향된다는 건 전적으로 제주도 유림만의 생각이 오롯이 적용된 것도 아닌 모양이다. 제주 오현과 당시 제주의 학파에 대한 부분은 좀 더 연구를 해봐야 할 사안이긴 하다.
어쨌건 같은 학자라고 하더라도 서원에 배향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다. 사실 오현에 든 인물은 대학자이긴 하지만 제주도민들과 더 직접적인 접촉을 했던 인물은 제주목사였다. 그런 점에서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약동이 오현에 배향되지 못한 점은 안타깝다. 이약동은 청백리였고, 그걸 실천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전편에 이어서 설명을 해보겠다.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이약동의 위패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이약동 위패는 귤림서원 동쪽 담장 밖에 집을 지어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 이약동의 위패를 모셨던 곳의 지위가 더 커지게 된다. 귤림서원에 오현을 모시게 되지만 이약동을 비롯한 여타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 이름을 얻게 된다. 처음엔 상현사로 불렸다가 나중엔 영혜사로 고쳐 부른다.
상현사는 이약동 외에도 이괴, 이형상, 김정, 김진용, 이렇게 다섯 인물을 모시게 된다. 한명만 빼면 다들 제주목사를 지낸 인물이다. 이들이 어떤 면면을 지닌 이들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겠다. 왜냐하면 제주도민과 직접 접촉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약동은 전편에서 다뤘기 때문에 나머지 4명의 인물에 대해 짧게 설명해본다.
이괴 목사(제주목사 재위 1658년 5월~1660년 5월)는 자신의 재임 중 장수당을 만들었다. 귤림서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제주 유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장수당이었다. 이형상 목사(재위 1702년 6월~1703년 6월)는 지금은 보물로 보존이 되고 있는 <탐라순력도>를 제작한 인물이다. 제주도민들의 신앙이던 신당을 파괴한 인물로 알려지긴 했으나,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김정 목사(재위 1735년 4월~1737년 9월)는 충암 김정과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화북포구 축성공사를 진두지휘했고, 제주도 사람들이 좀 더 많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삼천서당도 세웠다. 화북포구를 축성할 때는 자신이 직접 돌을 날랐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 임기를 마치고 화북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에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시신을 운구할 때는 화북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운구할 때 끈으로 썼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나머지 한 명은 제주사람인 명도암 김진용(1605~1663)이다. 김진용은 제주에서 이름난 유학자로, 장수당에서 유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김진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한다. 이들을 모신 사당은 처음엔 이름을 가지고 있지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귤림서원에 속한 별도의 사당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다가 1841년 이원조 제주목사 때 상현사라는 이름을 달게 된다. 그러다 7년 뒤에 영혜사라는 이름으로 고쳐 단다. 영혜사라고 이름을 고쳐서 달게 된 건 장인식 목사 때라고 한다. 장인식 목사는 추사 김정희와 친분이 있는데, 마침 추사가 제주에 유배를 와 있던 때였고, 영혜사라는 현판은 김정희가 써줬다고 한다. 아쉽게도 영혜사는 만날 수 없다.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졌다.
이렇게 본다면 귤림서원에 모셔진 오현보다는 영혜사에 모셔진 인물이 더 제주도민들과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에 목사로 내려온 이는 200명이 넘는다. 정확하게 286명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제주사람들을 진정으로 위한 인물들도 있다. 제주에서 삶을 마친 김정 목사가 그렇고, 전편에 소개한 이약동도 그랬다. 영혜사에 모셔지기도 한 김진용은 제주사람으로서 제주의 유학자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제주목사 4명과 김진용을 모시던 영혜사는 나중에 더 커진다. 김진용 위패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6분의 제주목사를 모셨다고 한다. 결론적으로는 영혜사에 모신 인물이 오현보다는 깊은 인연을 지녔다. 제주목사의 기본 임기는 2년이었고, 더 오랜기간 목사로 지내면서 제주사람들을 만난 이들이었다.
<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