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이약동이었지만 오현에 들지 못해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0> 귤림서원의 탄생
청백리 이약동이었지만 오현에 들지 못해
9월호에 오현의 시작을 알리는 충암 김정 선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생은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목숨을 잃는다. 그것도 고향이 아닌, 낯선 제주 땅이었다. 그를 기리는 사당이 만들어진 건 선조 11년(1578)이었다.
충암 선생의 사당은 당시 제주판관으로 있던 조인후가 세웠다고 기록에 전한다. 왜 제주목사가 아닌, 판관이었을까. 그때 목사는 임진이라는 인물이다. 무관이었다. 제주목사로 오는 이들은 문관도 있고, 무관도 있다. 제주도는 병마절도사를 겸해야 했기에 무관도 종종 내려온다. 조선 조정은 제주목사가 무관이면, 판관은 무관으로 파견을 했던 것 같다.
옛 문헌을 들여다보면 조인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조인후는 정치를 잘했던 모양이다. 제주사람들이 극찬했다고 나온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제주사람들이 말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제주도는 외딴 섬이어서 정치하는 이들이 제멋대로 하더라도 백성들이 하소연할 곳이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이따금 문관을 파견하는 게 좋다고 나오는데, 그 사례로 조인후를 들고 있을 정도이다.
판관 조인후가 세웠다는 충암 사당(충암묘라고 함)은 1667년 지금의 오현단 자리로 옮겨진다. 그걸 추진했던 인물은 제주판관 최진남이었다. 최진남은 1665년 판관으로 부임하면서 충암묘에 참배를 한다. 그런데 충암묘가 너무 궁색했던 모양이다. 옮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하루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게 할 일이 있어 장수당에 가게 된다. 참고로 장수당은 1660년 김진용이 이괴 제주목사에게 건의를 해서 지금의 오현단 인근에 세워진 상태였다.
최진남은 유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충암묘를 옮기는 얘기를 한다. 유생들도 환영이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장수당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최진남의 표현을 옮기자면 너무 평화롭고, 특별한 구역임을 느꼈다. 귤나무들이 우거져 고요하다는 평가도 내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귤림서원이다. 귤림서원의 첫 배향 인물은 충암 선생이 됐다. 충암묘가 옹색하다고 해서 서원을 세우고, 충암을 모시게 됐다.
그렇다면 오현은 언제 완전체가 됐을까.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다. 제주목사 이인은 자신이 제주에 온 이듬해인 1668년(헌종 9)에 이약동, 김상헌, 정온 선생을 추가로 모시게 된다. 충암묘가 세워진지 90년만이며, 오현이 아닌 4현이 갖춰진다. 하지만 현재 오현 선생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의 이름이 보인다. 이약동이다.
왜 이약동일까. 오현단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이약동이라는 인물을 알고 지나가는 것도 매우 중요할 듯하다.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들은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대상이다. 서원은 사립학교로서 유학자들을 배출하는 기능도 있지만, 존경할만한 유학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니는 기능도 아울러 갖고 있다.
또다시 읊지만 그런데 왜 이약동일까. 이유는 있다. 제주목사 이인은 이약동의 후손이었다. 이약동은 15세기 인물로 이인 목사와는 200년의 간극이 있다. 이인의 6대조 할아버지가 이약동 목사였다.
어쨌건 이약동 목사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청백리가 된 인물이다. 이약동은 성종 때 제주목사로 내려온다. 그는 2년 10개월간 목사직을 수행하면서 제주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다. 부정부패를 단속하기도 하고, 공물 수량을 줄여서 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다.
예전엔 한라산신제를 한라산에서 지냈다. 문제는 한라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다보니, 얼어서 죽는 사람이 생겼다. 이약동 목사는 그런 문제가 생기자 지금의 산천단을 만들어, 한라산에서 지내던 산신제를 산천단으로 옮겨서 지내도록 했다.
이약동 목사는 자신이 목사직을 내려놓고 떠날 때 사용한 물건을 모두 놔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가 쓰던 말 채찍은 오랫동안 관덕정에 내걸려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약동만 물건을 놔둔 게 아니라 함께 제주를 떠났던 관리들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약동 목사가 임기를 끝내고 배를 타고 떠나는데 배가 바다 한가운데 도착했을 때 배가 기우뚱 하길래, 혹시 막료 중에 속인 사람은 없는 가 찾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몰래 가져온 갑옷이 나타났다. 이약동이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하니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한다. 그 바다를 투갑연이라고 한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의 나이가 70일 때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니까, 성종이 허락해주지 않은 일화도 있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오현이 됐을 법도 한데, 이약동은 오현에서 탈락을 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자. 숙종 1년(1675)의 기록이다. 부호군 이선이라는 인물이 제주를 돌아보고, 제주에 있는 폐단 40가지를 보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내용을 보면 김정 사당이 있었는데, 제주목사 이인이 자신의 조부 이약동을 김정, 김상헌, 정온 삼현 위에 두어 욕되게 하고 있다면서, 이약동 위판을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양반 지배층과 논의도 없이 이약동 위패를 귤림서원에 앉혔다는 보고였다. 결국 이약동은 오현이 되지 못했다. 부호군 이선고 이인 목사와는 껄끄러운 사이였을까.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