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 김정이 아니었더라면 제주의 오현은 없어”
“충암 김정이 아니었더라면 제주의 오현은 없어”
제주사람들은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강하다. 특히 남자 고등학교 가운데 ‘오현고등학교’가 지닌 이미지는 무척 강하다. 동문들도 잘 뭉치고, 1982년 11월 15일부터 동문소식지인 <현우지>를 매주 발간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현’은 ‘오현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현은 다섯 명의 현인을 뜻한다. 오현고 출신들은 고교에 입학하면 오현을 외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현고 출신이 아닌 이상, 오현단의 배향 인물이 되는 오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몇 차례 오현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오현은 충암(冲菴) 김정, 규암(圭菴) 송인수, 청음(淸陰) 김상헌, 동계(桐溪) 정온, 우암(尤 庵) 송시열, 이렇게 다섯 현인을 말한다. 이들 가운데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오현을 배향하는 오현단은 제주성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난 1971년 제주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오현단이 위치한 이 자리는 예전 유생들을 가르치는 귤림서원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사리진다. 그때가 고종 8년인 1871년 여름이다.
오현단은 서원이 사라지고 나서 다섯 현인을 제사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유생들의 건의로 만들어진다. 귤림서원이 철폐된 지 21년 후인, 1892년에 오현단이 등장한다. 이때 다섯 현인들을 제사하기 위한 제단석(조두석이라고도 부름)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가 보는 오현단의 모습이 됐다.
이제부터는 오현으로 모셔지고 있는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겠다. 우선 충암 김정부터 알아보자. 충암 선생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회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를 왔다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렇게 죽은 김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는데, 이게 오현단의 시초가 된다.
충암은 조광조 등과 더불어 정계의 핵심 개혁 세력 가운데 한명이었다. 하지만 기묘사화로 그의 운명은 바뀐다. 그가 제주에 유배를 온 시점은 중종 15년(1520)이다. 충암은 유배를 온 그 이듬해에 죽게 된다.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충암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10살도 되기 전에 사서를 익혔다고 한다. 22세엔 과거시험에서 1등을 한다. 장원급제를 한 인물이다.
한창 젊음을 불사르던 청춘은 사화에 연루돼 마감되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오현단이라는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제주에 유배를 온 짧은 기간에 제주 이야기를 남겼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제주풍토록>이 있다. 제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그의 글은 정보의 중요성을 알렸고, 이후 제주에 온 이들이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는 원천이 됐다.
충암은 자신이 살았던 흔적도 이야기로 남기고 있다. 충암은 우물을 만들어서 제주도 사람들이 마시게 했다고 전한다. 그런 우물로 ‘판시물’ 혹은 ‘판서물’로 불리는 터가 남아 있다. 오현단 북쪽으로 가면 동문시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일대에 ‘판서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판서정’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기묘사화는 조선 4대사화의 하나로 꼽는다. 수많은 인재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이 이야기는 충암 김정의 17세 후손인 김응일씨로부터 직접 듣기도 했다.
김응일씨에 따르면 충암의 유해는 세상과 이별을 한지 1년 후에 고향으로 모셔오게 됐다고 한다. 당시 충암은 복권된 상태가 아니었다. 고향에 모셔오긴 했으나 복권도 되지 않았기에 비문을 쓰지 못하고 백비로 남겨두게 됐다고 한다.
그 백비는 복권이 되면 쓰려고 땅에 묻어뒀다고 한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백비는 잊혀진다. 그 사이에 충암은 복권이 됐고, 그의 업적을 알리는 비가 세워져 있었다.
잊혀진 백비는 대청호가 생기면서 세상에 드러난다. 충암 선생의 묘도 수몰지역에 포함돼 있었기에 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김정 후손들이 살던 땅은 대청호 바닥에 잠기게 되는데, 종손 김응일씨 아버지의 꿈에 백비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꿈 덕분인지 땅에 묻혀 있던 백비가 수백년을 견디고 땅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백비는 충암 김정 종손댁을 찾으면 만날 수 있다. 현재 충암 묘소는 대전시문화재 제25호로 지정돼 있다.
다시 제주로 건너와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충암 김정을 추모하는 사당인 충암묘(冲菴廟)가 등장하는 건 선조 11년(1578)이다. 제주판관인 조인후가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오현의 완전체는 100년이 흐르고 나서의 일이다. 김정에 이어 송인수, 김상헌, 정온이 배향되고, 송시열이 추가되면서 오현을 배향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