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낭만이 흐르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곳
詩와 낭만이 흐르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곳
영국 호수지방 |
새소리, 자욱한 안개, 호수의 잔잔한 물결,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떼 등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은 호수지방은 영국 속에 또 다른 영국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목가적인 풍경과 보드라운 햇살이 일품인 이곳은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곳이기도 하지만 워즈워스를 떠올리면 쉽게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
호수지방은 윈더미어, 그라스미어, 앰블사이드, 코커머스 등 잉글랜드 북서부의 컴벌랜드 일대를 가리킨다. 동서 20킬로미터, 남북 30킬로미터에 걸쳐 크고 작은 다양한 호수들이 흩어져 있는 이곳은 영국에서 자연생태계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구릉과 구릉 사이로 이어진 산 주름마다 크고 작은 호수와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자연의 고마움을 만끽할 수 있는 호수지방. 맑은 호수를 따라 난 수많은 산책로에는 한 편의 시가 춤을 출 만큼 풍요와 여유로움으로 넘쳐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윌리엄 워즈워스 역시 이 호숫가의 산책로를 사랑했고, 자연의 시가 흐르는 산책로에서 예술의 영감을 얻었다. 특히 경이롭기까지 한 이런 멋진 풍광들이 워즈워스를 영국 대표 낭만파 시인으로 만든 원천이 아닐까 싶다.
호수지방은 워즈워스가 가장 사랑한 곳이자,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소다. 이곳은 그의 아름다운 시심의 자양분이며, 그의 무덤이 있는 그라스미어 예배당 뒤뜰은 너무나 조용하고 아늑하다. 그가 쓴 <무지개>, <수선화>, <초원의 빛> 등 주옥같은 시들이 모두 이 호수지방을 배경으로 한다. 낮은 구릉과 호수가 빚어내는 더 없이 아름다운 자연 풍광 앞에 서면 워즈워스가 아닌 누구라도 시인이 될 것만 같다. 비 갠 오후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떠오르고, 푸른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과 소를 보면 <초원의 빛>이, 호숫가 나무 아래에 수줍게 핀 꽃들을 바라보면 <수선화>가 마음속에 일렁인다. 호수지방은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오감을 자극해 우리를 아름다운 감성 코드로 무장시킨다. 이 중에서도 워즈워스가 걸었던 호숫가를 걷다보면 그의 시, <수선화>를 읊조리는 나지막한 소리가 가슴 깊이 여울진다.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에 하늘하늘 춤추는
금빛 수선화의 무리를
은하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어져
물가 따라 끊임없이
줄지어 뻗쳐 있는 수선화
즐겁게 춤추며 고개를 까딱이는
수많은 꽃들을 잠시 바라보네.
위대한 시인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유유자적 걸으며 시와 느림의 미학을 꿈꿀 수 있는 호수지방은 굳이 지상의 낙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충분하다.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흐르는 이곳에서 워즈워스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또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낸다. 저 바닥 깊이 눌려 있던 감성들이 스스럼없이 일어선다.
좀 더 워즈워스의 예술적 영혼과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그라스미어’라는 작은 마을로 가야한다.
우리의 리(里) 정도에 해당할 만큼 아주 작은 규모의 그라스미어는 우리의 제주도처럼 앙증스런 돌담이 초원을 가르고, 워즈워스의 시구처럼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밀레의 풍경화처럼 그려지는 곳이다. 그래서 워즈워스도 이 조용한 마을을 가장 좋아했고, 그의 작품도 이곳에서 가장 많이 집필됐다. 그 당시 그가 머물렀던 도브 코티지에 들어서면 워즈워스의 삶의 향기가 진하게 스며있다. 도브 코티지는 현재 워즈워스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당시 그의 일가족이 사용했던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원래 이곳은 여관으로 사용한 것을 워즈워스 부부와 여동생이 지인의 도움으로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코티지 내부는 소박하고 아담하다. 벽난로와 주인을 닮은 꾸밈없는 가구들, 생활용품 등이 전시돼 있다.
코티지 앞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그 안에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다. 워즈워스는 이 산책로를 상당히 좋아했고, 매일 아침 혼자서 산보를 하며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8여 년간 도브 코티지에 머물렀던 워즈워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황금기를 이곳에서 맞는다. 주옥같은 시를 쓰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 등 자신 내면에 숨겨둔 무한한 감성들을 글로 옮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
코티지에서 마을로 향한 좁은 도로를 따라가면 그의 무덤이 있는 세인트 오스왈즈 교회에 이른다. 수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인 그의 비석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 속에 진한 감동의 물결이 일렁인다. `1850년 윌리엄 워즈워스, 1859년 마리 워즈워스`라고 새겨진 부부의 비석에는 세월의 이끼가 그대로 남아 있다. 비석 바로 앞에는 그가 좋아하던 실개천이 흐르고, 물 위에는 오리 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그가 죽어서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행복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의 영혼이 잠든 오스왈즈 교회는 중세 시대 때부터 이 마을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투박한 교회는 워즈워스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 사색과 산책으로 노년을 보낸 워즈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호수 주변을 산책하다가 감기에 걸려 목숨을 잃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하늘 호수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