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비단천 펼쳐 놓은 듯 절정의 단풍속을 걷다
단아한 비단천 펼쳐 놓은 듯 절정의 단풍속을 걷다
천아숲길 |
언제부터인지 굴러가는 차바퀴에 날리는 알록달록 단풍잎이 거리의 가장자리에 쌓인다. 연분홍빛 꽃눈을 날리던 벚나무들이 이젠 붉은 여인의 치맛자락이 날리 듯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봄의 꽃 소식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지만 가을 단풍은 기온차가 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래서 제주도는 늦가을에 단풍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단풍은 일교차가 크지 않으면 제 색깔을 내지 못하고 그냥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제주도의 따뜻한 기온은 아름다운 단풍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언제나 한라산 깊은 곳에서 남들 몰래 화려함을 숨기고 져버려서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 단풍구경 나들이로 가을이 분주하다. 그런데 올해는 예외 인 듯하다. 그나마 제주도에서 가을이라면 단풍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천아 계곡’인데 큰 기대 없이 벗들과 찾은 ‘천아 계곡’은 화려하면서 단아한 비단 천을 펼쳐 놓은 것처럼 눈이 부실 만큼 색색이 물들어 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지만 숲의 기온과 계곡의 기온차이로 어느 계곡이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명한 육지 산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올 해 ‘천아 계곡’ 단풍은 감동이다.
화려한 풍경화에 넋을 잃고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중, 장년 할 것 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구르는 낙엽에도 깔깔 웃던 소년, 소녀로 돌아가 간 듯 감탄의 연속이다. 또한 이곳은 계곡 옆으로 ‘한라산 둘레길’과 ‘천아 숲길’이 만들어져 트레킹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계곡으로 들어오려면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우리의 생활 수를 저장했던 ‘천아 수원지’를 지나게 된다. ‘천아 수원지’를 관리하기 위해 계곡 입구와 계곡 부근에 건물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 버려져 흉가로 변해가지만 건물을 감싸고 자라는 담쟁이의 단풍이 곱게 물들 때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발길을 잡는다.
관리차량들이 다녔던 넓은 길은 우거진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으로 멋진 카펫이 만들어졌다. 낙엽 카펫을 걸으면 나도 우아한 배우가 된 것 같은 착각도 이 길에서 주는 보너스다. 스스로 낙엽도 날려보고 작은 계곡 바위 위에 깔린 단풍잎 위에 누워 나무들 사이로 간접 햇빛에 행복해진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생강나무’ 아래 탈색된 듯 하얀 빛의 ‘참회나무’가 인위적으로 가져다 놓은 듯하다. 빛도 들어오기 힘든 숲 터널 넘어 마법의 성으로 이끄는 불빛처럼 밝아지는 터널 끝에는 드넓은 초원이 기다린다. 야생 진드기의 경계심도 잊어버리고 너도 나도 풀밭에 앉아 작품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 해맑다. ‘천아 계곡’과 ‘천아 수원지’ ‘천아 숲길’ 작명의 근원이 이 드넓은 초원에 우뚝 서있는 ‘천아 오름’이다. ‘하늘아래 나’라는 ‘천아 오름’은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제주시에서 맑은 날 보면 정말 우뚝 선 위상이 이름값을 한다. 계곡으로 터진 분화구는 매년 멋진 단풍 숲을 보여준다. ‘천아 오름’을 뒤로하고 한라산 쪽으로 향하는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다시 ‘천아 계곡’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이어진다.
단풍은 나무가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부족한 물과 양분을 잎까지는 가지 못하게 ‘떨기’층을 만들어 광합성 작용을 못하는 잎은 엽록소인 초록색을 잃어버리고 나무마다 가지고 있는 화학 성분에 의해 붉은 색과 노란색, 갈색 등으로 변해서 떨어지게 한다.
자기 몸의 일부를 강제로 떨어뜨리면서 그 아픔을 화려한 색으로 보상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새벽이슬에 얼어있는 단풍잎이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준다.
모든 것에 의미와 가치가 있겠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단풍이 절정인 이 가을을 마음껏 즐길 자격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