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서로 다른 구조물이지만 봉수와 연대 그림 똑같아

제주한라병원 2017. 9. 27. 14:36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탐라순력도 이야기 <32> 봉수와 연대 2

 

서로 다른 구조물이지만 봉수와 연대 그림 똑같아

    

 

임진왜란은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고, 군사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문에 조선이 당한 건 셀 수 없다. 다행히도 제주도는 어지러움을 비껴갔다. 그렇다고 제주도가 전쟁의 와중에 그냥 쳐다만 볼 상황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도와야 했다.


전쟁이 일어난지 1년 후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선조 26년(1593년) 4월 기록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꼭 1년 후의 이야기다. 제주목사였던 이경록은 육지부에 군사를 파견하기 위해 군사 200명을 뽑아뒀다. 그러곤 조정에 제주사람들을 육지부 전투에 파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비변사는 이경록의 요청을 거부한다.

“탄환같은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다행히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일개 섬의 힘만으로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바다를 건너 멀리 천리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경록의 충성스럽고 분한 마음은 알겠으나 형편상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13일 정유>


선조는 비변사의 뜻을 따랐다. 당시 선조는 한양에 돌아온 때는 아니다. 1593년 4월에 왜군은 서울에서 물러나지만 선조는 6개월 후에야 도성으로 들어온다. 명나라가 한창 왜란에 개입한 시기였고, 전투 역시 치열했다. 비변사 입장에서는 승리를 장담하기도 그렇고, 나중에 전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제주도는 제주도 자체에서 지켜줄 것을 바랐던 모양이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 전쟁은 참혹하지만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전라도 일대 의병장으로 고경명이 있다. 임진왜란 초에 전라도관찰사가 이끄는 관군 5만명이 수천의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하자 그는 격문을 돌려 6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싸웠다. 안타깝게도 그는 금산전투에서 작은아들인 고인후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고경명은 생전에 격문을 제주에 보내 말을 받아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다. 홀로 남겨진 큰아들 고종후도 이듬해 스스로 ‘복수 의병장’이라 이름 붙이고 왜군에 맞선다. 고종후는 장흥고씨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고을나의 후손이라 칭하며 제주에 원군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격문을 통해 “제주도 세 가문은 역량과 재물에 따라 의병을 도와라”고 했다. 실제 고종후의 격문이 어느정도 힘을 발휘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제주도는 임진왜란의 무풍지대였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눈을 딱 감고 모른채 한 건 아니다. 자체 방어시설을 갖춰나갔다. 제주목사 이경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주성 밖에 해자를 파고, 왜군이 배를 댈 가능성이 있는 바닷가에 방죽을 쌓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에 제주에 있던 봉수와 연대 역시 확실하게 정비됐을 가능성이 높다. 더 견고하게 쌓았고, 상시 방비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탐라순력도>는 모두 41점의 그림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봉수와 연대가 그려지지 않은 그림은 21점이다. 절반은 봉수와 연대를 그려넣고 있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3읍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엔 봉수와 연대가 빠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봉수는 오름의 정상 부분에, 연대는 바닷가를 접한 곳에 있기 때문에 3읍을 그린 그림엔 등장하지 않는다.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봉수와 연대 그림에서 눈여겨볼 건 돌로 쌓았는지의 여부이다. 바닷가를 경비하는 연대는 현재 눈에 보이는 그대로 돌로 쌓은 건 확실하다. 예전 모습도 돌이었고, <탐라순력도> 역시 돌로 쌓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면 봉수는 어떨까. 이게 문제이다.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봉수의 모습과 현재 볼 수 있는 봉수의 모습은 차이가 난다. 우선 <탐라순력도>를 보자. 여기에 등장하는 봉수는 모두 연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연대이든, 봉수이든 그림이 똑같다. 봉수라는 걸, 연대라는 걸 써놓지 않을 경우 봉수인지 연대인지 구분을 하지 못한다.

만일 <탐라순력도>의 그림이 실제 봉수의 모습이라고 했을 경우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높은 오름 정상에 있는 봉수는 가로로 선을 그어 돌로 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정말 봉수는 돌로 쌓았을까. 연기를 뿜어낼 봉수대는 돌로 쌓을 수도 있지만 봉수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렇지 않다. 글쓴이는 30년 전에 제주도내 봉수와 연대의 흔적을 쫓아다닌 적이 있다. 오름 정상에도 오르고, 바닷가에 있는 연대를 직접 탐방했다. 결론은 이렇다. 연대는 돌로 쌓은 구조물이었으나, 봉수는 흙으로 된 시설이었다. 그렇다면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봉수는 거짓인가. 그렇다기보다는 봉수와 연대를 똑같은 모양으로 그림으로써 방어유적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도록 한 그림기호의 느낌이 더 강하다.

 

사진설명. <탐라순력도> 중 ‘수산성조’. 가운데 보이는 협자연대나 오른쪽 수산봉수의 모습이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