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하나로 묶어주던 벵듸, 무관심 속에 사라져
제주를 하나로 묶어주던 벵듸, 무관심 속에 사라져
△인동덩굴
어림비 벵듸 마지막 이야기
다섯 번째 ‘어림비 벵듸’를 이야기하다보니 마지막이 되고 있다. 애월읍을 시작으로 한림읍상대리까지 벵듸가 이어지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농로는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을 잃어가면서 생태보호 지역으로 묶여 방치되어 가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 간간히 습지들이 보이게 되는데 사람이 근접할 수 있는 곳은 몇 곳이 안 된다.
그 중에 2차선 차도를 끼고 제법 큰 습지가 눈에 띈다. 한리읍 상대리 513번지라는 것 말고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곳에 형태를 잘 갖추고 있는 물통이다. 요즘 같은 가뭄에도 바닥을 들어내지도 않고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물이 고여 있다. 주위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울타리를 만들고 있으며 재방으로 둘러 싸여 예전에는 주변의 농사와 가축들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음을 추측해 본다. 옆의 2차선 아스팔트길은 인가가 없어 차량의 통행이 적기도하지만 웃자란 나무들과 높은 재방이 습지의 모습을 감추고 있어 지나면서도 발견하기 쉽지 않게 되어 있다. 사잇길 넘어 산 담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작고 아담한 연못이다.
오랜 세월 늘어진 ‘찔레나무’에는 하얀 찔레꽃이 향긋한 향을 바람에 날리고 꾸지뽕나무에는 어느새 초록색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사람의 간섭이 없으면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잡는 ‘예덕나무’는 넓은 잎으로 습지 안으로 그늘을 만들어주니 날아다니는 새들과 잠자리의 안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한 여름 한들한들 부부금실을 꽃피울 자귀나무도 잎이 무성하다. 하얗게 피었다가 수정이 끝나 자기 역할을 다하고 노랗게 시들어가는 ‘인동덩굴’의 금은화가 곱다. 바닥을 기며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 눈길을 끄는 뱀 딸기는 ‘뱀’이 활발히 활동하는 때를 알리고 있다. 꽃핀 것도 못 봤는데 어느새 익어서 입 맛 다시게 하는 줄 딸기 열매 아래 ‘국화잎아욱’ 꽃도 참 곱다. 제법 높은 재방 아래 앙증맞은 ‘마름꽃’이 방긋방긋 웃는다. 물속을 들여다보면 우주선을 닮은 작은 열매가 둥둥 떠 다린다. 예전에 구황식물로 먹었다는 ‘마름열매’다. 열매를 익히면 ‘밤’ 맛이 나서 밥 위에 얻어먹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생긴 모습이 특이해서 악세사리 재료로 쓰이고 있다. 이방인이 온지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왕잠자리’의 사랑방도 몰래 담아 본다. 화려한 몸을 잎으로 가려봐도 눈에 띄는 ‘얼룩무늬하늘소’가 귀엽다. 새들의 배설물과 노루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이곳에서 숨 쉬고 있을까? 습지 둘레를 돌다보니 안쪽으로 구분된 작은 습지는 말라서 형태를 잃어가고 있다. 주변에 농사도 짖지 않고 가축도 방목하지 않아서 지금은 그 기능을 잃어버린 습지지만 마르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건 밑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세월이 지나고 이곳도 개발의 손길에 밀려 여기에서 의지하고 사는 작은 생명들도 습지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대로 방치된다면 안타까운 현실은 더욱 빨리 올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림비 벵듸’만이 아니라 제주도 전지역의 ‘벵듸’는 우리 생활권에서 해손 되기도 하고 방치되어 그 이름을 일어가고 있다. ‘벵듸’에는 오름도 있고 곶자왈도 있고 습지도 있고 넓은 들판의 초원도 있는 그야말로 제주를 하나로 묶어주는 곳이다. 이렇게 중요한 곳이 우리의 무관심에서 사라지고 있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