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문의 神’ 위선적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역사 속 세상만사- 야누스의 누명 Ⅰ-
‘출입문의 神’ 위선적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정치란 무엇입니까.”
“백성의 양식이 넉넉하고, 국방력이 튼튼하며, 백성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잘하는 정치다.”
“어쩔 수 없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린다면 맨 먼저 무엇을 버릴까요.”
“군대를 버려야지”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이 먼저입니까.”
“차라리 양식을 버려야지.(백성의 신뢰는 절대 저버리면 안 된다는 뜻)”
공자가 훗날 노나라 재상이 된 자공과 나눈 대화에 나오는 얘기다. 좋은 정치인이나 지도자에게는 경제나 국방보다 국민과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비단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정치를 공부하면 신뢰가 정치의 기초라는 것은 상식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과의 신뢰를 저버리고 수 년동안 최순실로 대표되는 비선 실세들에게 사사로이 국정을 농단하도록 방조 내지는 공모한 것으로 의심되어, 국회의 탄핵을 받고 직무가 정지되었다. 공자의 가르침은 고사하고 너무 저급해 입에 올리기에도 창피한 수준의 행태와 그 증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국민들은 몇 년 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내놓았던 말과 약속들을 떠올리며 커다란 상실감과 배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박근혜’ 라는 말도 들려온다.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모습을 두고 ‘야누스의 얼굴’이란 말이 종종 사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속히 이러한 혼돈의 과정이 정리되고, 대한민국이 건강한 리더십 위에서 4차 산업혁명의 거친 파도를 힘차게 헤쳐 나가게 되기를 새해 소망으로 빌어본다.
우리는 흔히 종잡을 수 없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사람을 두고, 야누스적이라거나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는 서로 다른 방향, 즉 하나는 앞을 바라보고 하나는 뒤를 바라보는 모습 때문에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중성을 가졌다고 이해되기 쉽다. 때문에 ‘야누스’는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사용하는 비유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신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야누스가 억울해 할 이야기다. 이번 호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비유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야누스’의 억울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문지기, 또는 문(門)의 수호신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배움의 실마리를 주는 신이다. 야누스가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이라는 이미지는 공정하지 못하다. 로마의 신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또 가장 위엄을 갖춘 신이기도 한 야누스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히 건물의 출입문을 지키기 위해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얼굴은 들어오는 사람을 검문하고, 다른 얼굴은 집을 떠나가는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그는 집안의 안전과 도로의 보호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누스는 상당한 권력도 잡았고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모든 출입문의 신이 되었고, 로마인 공동체가 로마 시를 건립했기 때문에 로마의 모든 성문과 항구의 안전도 담당했다. 도로의 신으로서 또한 인생의 첫 번째 위대한 통로인 출산을 관장하였고, 곧 새해의 시작을 포함해서 모든 시작을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누스에게 내리막길이 닥쳐왔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신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 신화에는 야누스와 유사한 신이 없었기 때문에, 야누스의 위상에 손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야누스는 신의 지위에서 단순한 왕으로 격하되었고, 그의 자리를 사투르누스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투르누스(새턴, 로마의 농경 신)는 그리스의 신 크로노스와 동일시되었다. 이러다 보니 초기 문의 신으로서의 야누스는, 새로운 신화에 의해 사후에 신으로 모셔져 하늘의 문지기로 승진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이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이 이중적인 지위를 가지게 된 저간의 사정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야누스는 위선자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야누스의 이름이 현대에서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샤프테스버리의 백작, 안소니 애슐리 쿠퍼에 의해서다. 그는 『인간, 의견, 시간의 특성』(1711)에서 ‘한쪽 얼굴로는 미소를 억지로 짓고, 다른 쪽 얼굴로는 노여움과 분노 외에는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 작가의 야누스의 얼굴(이중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표현 이후로 야누스에 대한 원래의 이미지를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누군가에게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하면, 그는 신화를 세세히 다시 읽어보지 않는 한 강한 노여움과 분노를 쏟아낼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