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하나 없이 넓게 펼쳐진 천상의 화원
그늘 하나 없이 넓게 펼쳐진 천상의 화원
차귀도와 엉알길
제주도 온 섬이 억새의 물결로 출렁이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설레게 된다. 그 설레는 마음을 멀리 떠나지 않아도 충족시켜 줄 곳이 제주에는 아주 많다.
그 중에 제주도 서쪽 끝 한경면 고산리에 가면 자구내포구 건너 차귀도라는 몽환의 섬이 있다. 자구내 포구에서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거리의 차귀도는 크게 3개의 섬으로 되어있다. 본섬인 ‘죽도’ 독수리의 형상을 한 ‘지실이섬’ 임산부가 배에 손을 올려놓고 누워 있는 모양의 ‘와도’ 가 있다.
그 중에 ‘죽도’는 지질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탐방로를 만들어 트레킹을 할 수가 있다. 선착장에서 출발해서 5분이면 ‘죽도’ 아래 도착한다. 선착장에 내려 오르막이 시작되고 돌계단 따라 잠시 오르면 차귀도의 생활과 역사를 알 수 있는 폐건물이 먼저 반긴다. 1970년 초까지도 7가구가 살았던 유인섬이었다는 흔적이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섬 가장자리에 무성하게 자라는 ‘시누대(산죽)’으로 대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 갔다고 한다. 고산리와 이웃하고 있는 용수리에는 죽도에 ‘시누대’로 대바구니를 만들러 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던 부인이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절부암’이 차귀도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 소설가의 ‘시누대의 숲에 가면 바람이 보인다’라는 책 제목을 떠올리며 흔들이는 대숲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 본다. 섬 기슭 절벽아래에 기묘한 형상의 바위는 저마다 이름 있다. 설문할망의 오백장군의 막내인 ‘장군바위’가 외로이 서있는 반면 코끼리 코를 하고 있는 쌍둥이 바위가 나란히 내려다보인다. 서쪽능선을 따라 돌다보면 밀물과 썰물이 만나 부딪치며 생기는 거센 파도를 보면 제주의 맥을 끊으러 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다는 ‘호종달’전설이 사실이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섬 전체는 억새가 빛을 받아 은빛 금빛 출렁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기도 한다. 발아래는 노란 ‘감국’과 보라색 ‘쑥부쟁이’가 방긋 방긋 눈 맞춤을 하고 풍화로 깎여진 절벽에도 ‘감국’이랑 ‘쑥부쟁이’이가 한다발씩 피어서 감동을 준다. 해녀의 아픈 전설이 있는 ‘해녀콩’은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잎만 길게 늘어져 있다. 제주에서만 자생하는 ‘해녀콩’의 새색시 연분홍 치마 색의 고운 꽃을 보려면 여름에 차귀도를 찾으면 된다. 몸에 좋다는 방풍이라 불리는 ‘갯기름나물’도 억새 아래 초록잎이 건강하다. 꽃길에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새 하얀 등대가 있는 가장 높은 곳에서 섬 전체를 내려다보게 된다.
쌍둥이바위 | 절벽화원 |
섬 너머로 보이는 수월봉의 절벽을 보면 지질학자들이 말하듯 수월봉과 이곳 차귀도는 하나의 화산섬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 속에 무너지고 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세월 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 지 궁금하다. 내려가는 길 능선사이로 보였다 사라지는 오름의 신기루도 걷는 재미를 더해주며 어디선가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꽃내음에 발길이 멈추어 두리번 찾다보면 보일 듯 말 듯 나뭇잎 사이에 피어있는 보리밥나무 꽃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늘하나 없이 넓게 펼쳐진 천상의 화원인 차귀도는 1시간 탐방시간이 턱없이 짧아 아쉬워진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자구내포구에서 시작해서 수월봉 아래까지 이어진 ‘높은 언덕 절벽아래 바닷가’라는 뜻을 가진 ‘엉알길’ 걷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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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콩 | 이고들빼기 | 감국 |
한쪽은 절벽의 단면에서 자라는 야생화와 초록의 싱그러움이 있고 한쪽은 검은 현무암과 부딪치는 하얀 파도의 풍광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힘들 만큼 아름다운 감동이다. 왕복 2km의 길을 갔다가 돌아올 때 좀 전에 걸었던 차귀도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인섬이며 섬 전체가 ‘천년기념물’로 지정이 될 만큼 중요한 동식물의 서식지이다.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배수송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 섬 탐방로는 길을 닦아 놓은 듯 잘 다져져있어 걷기는 좋아도 그 만큼 섬이 훼손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커진다. 마을의 천년자원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옛날에는 젊고 예뻤지!’ 하는 말에 누군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난다. “사람은 지금 이순간이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다. 세월은 점점 흐르고 모습은 자꾸 변하는 것이니깐 지금 이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처럼 자연도 지난 모습이 아닌 지금 이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기에 자연의 풍화로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람의 간섭으로 빨리 변해간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