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그 찌는 날에도 숲은 숨쉰다
폭염! 그 찌는 날에도 숲은 숨쉰다
이승악숲길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조금만 움직이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한 날에 친구에게 숲에 가자고 했더니… “이런 날에는 에어컨 아래가 천국이야”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그래도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숲을 여자 혼자서는 위험하기에 억지로 천국(?)에서 또 다른 천국을 찾아 숲으로 향했다.
제주시에서 516도로를 굽이굽이 돌아 시원한 돈내코계곡의 유혹을 뿌리치고 좌회전을 하면 남조로 방향으로 신례천을 끼고 ‘이승악 숲길’이 나온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속하며 편도 3.2㎞의 제법 거리가 있는 상잣성 숲길이다. 유난히 속력을 내는 도로 옆 숲길에 들어서면 잠시 앞이 어른거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눈부심에 갑자기 어두워진 숲에 적응하게 되면 좀 전의 무더위는 순간 잊게 된다. 얼마 전 산매자나무의 앙증맞은 꽃이 생각나서 열매가 있을까 찾아보지만 열매는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숲 밖의 폭염에 숲 속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찬찬히 발아래에 눈을 떼지 못하고 한발 한발 딛고 있는데 하얀 수정이 반짝인다. ‘버어먼초’다. ‘석장(스님지팡이)’이라고도 하는 제주도 숲에서 자라는 부생식물로 부엽토의 영양분으로 이렇게 습한 여름에 숲에서 만날 수 있다. 손톱보다 작은 꽃대에 노란 립스틱을 바른 듯 피어 있는 모습은 저절로 미소 짓게 한다. 버어먼초 주위에는 썩은 나뭇가지처럼 꽃잎이 다 떨어진 ‘무엽란과 제주무엽란’이 검게 무리지어 있다. 허리를 굽히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우며 봐도 뭐지? 하고 지날 뿐 우리가 아는 난초과 식물이란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게 생겼다. 같은 종이지만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모양이나 특징이 살짝 변해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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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버섯 | 배젖버섯 | 털낙엽버섯 |
특히 제주도는 지질이나 지형이 특이해서 다른 독특한 개체가 많이 생기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듯 생명은 환경에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 환경을 거스르며 파괴하므로 요즘 같은 이상 기후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숲에서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또한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폭염에도 작은 생명체의 꿈틀거림에 힘을 얻는 것도 숲이다. 8월의 숲은 아주 습해서 야생 버섯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숲의 원활한 순환을 위해 꼭 필요한 야생버섯들은 숲을 찾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형형색색의 색과 모습을 하고 죽은 나무 살아있는 나무의 빈틈에 어김없이 자리를 잡고 있는 버섯들을 만날 때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썩어가는 나뭇잎위에 촘촘히 자라고 있는 낙엽버섯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으니 나무 그루터기에서 비집고 나오는 초록버섯이 자기를 봐달라고 한다. 하얀 달걀껍질을 깨고 나오는 붉은 달걀 모양의 달걀버섯은 버섯 광이었던 로마 네로황제와의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정말 먹음직스러운 버섯들도 만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버섯이라고 해도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독을 가진 야생버섯이 많기 때문에 버섯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숲에서, 산에서 만나는 버섯은 관상용으로 건들지 않아야 한다. 늘 만나는 건 아니지만 숲에는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 중에 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날도 멸종 위기 1급의 ‘비바리 뱀’을 만났는데 나는 반가워서 카메라에 담았지만 뱀은 먼저 공격은 안 해도 독이 있으니깐 숲에서는 늘 조심해야 한다. ‘비바리 뱀’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살고 있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나무에 꽃들이 너도 나도 피고 지면서 숲을 찾게 하지만 이렇게 무더위가 기승하는 8월에는 화려한 꽃들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숲이다. 꽃 나들이가 끝나면 그늘을 찾아 숲에 가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작고 아름다운 생명체를 만나는 선물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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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무엽란 | 버어먼초 | 비바리뱀 |
이 숲에는 다른 숲에서는 쉽게 찾기 힘든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금나무’와 ‘모새나무’가 대표적인데 꽃부터 열매까지 보는 즐거움을 준다.
모새나무는 벗어지는 수피(나무껍질)가 특이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 하게 한다. 또한 고근산에서 신례리까지 이어진 상잣성이 옛 모습 그대로 길을 나누어 관문을 통과 하듯 지나는 재미도 있으며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하천을 만들어 ‘해거믄이소(沼)’라는 신비스러운 곳도 만나게 되는 보너스도 이 숲에는 있다.
최종 목적지인 ‘이승악’을 오르지 않아도 숲의 기운만으로도 더위를 날려버릴 수 있다.
이렇게 가물고 무더운 여름에는 우리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어 쉬게 해주는 나무들이지만 강수량이 많지 않아 땅 속에 있는 물을 왈칵 왈칵 먹어 치울 수도 없어 그 양을 조절하느라 힘들 것이다. 우리 인간의 생활이 자연을 좀 더 이해하고 아끼며 산다면 더위는 한풀 꺾이고 물이 없어 죽어가는 생명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상초유의 무더위에 우리의 숲이 잘 이겨내길 바라며 숲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