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주는 선물과 함께 걷다보면 어느새 다다라
숲이 주는 선물과 함께 걷다보면 어느새 다다라
상잣성길
봄을 느끼기도 전에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강한 햇살을 피해 그늘을 찾아 숲으로 우거진 숲을 찾아 가고 싶어진다. 이렇게 숲이 그리울 땐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숲길이 있다. 족은노꼬메와 큰노꼬메오름을 이어주는 ‘상잣길’이다. 다시 말해서 상잣성을 따라 이어지는 숲속 오솔길이다.
잣성은 조선시대에 제주의 중산간 지역 목초지에 만들어진 목장 경계용 돌담이다. 제주도가 원나라의 관섭으로 목축업이 시작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최대의 말 공급지로서 10소장 국영목장을 만들어 중산간지역에 말 방목을 하였다. 그러면서 말들을 관리하기 위해 잣성를 만들었고 위치에 따라 중산간의 하잣성(해발150m~250m일대)과 중잣성(해발350m~400m일대) 그리고 상잣성(해발 450m~600m일대)으로 구분해서 말을 방목했다.
하잣성은 말들이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위해, 상잣성은 말들이 한라산 지역을 들어가 얼어죽거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잣성은 하잣성과 상잣성 사이에 만들어 놓았다. 곶자왈이나 오름과 한라산 자락의 숲길을 걷다보면 종종 만나는 잣성은 초행길이라도 익숙한 듯 편안하고 정겨운 생각이 든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며 길을 잃을 것 같지 않은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인 듯 하다. 제주도에만 있는 이런 잣성이 개발과 무관심으로 훼손되고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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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딸기 | 박쥐나무 | 버찌 |
들어가는 초입부터 발길을 잡는다. 산뽕나무에 오디가 까맣게 익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손톱 만 한 오디를 한줌 따서 입안 가득 털어 넣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 높이 있는 열매를 딸 수 없어서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지는 열매를 주워 먹던 추억이 새롭다. 산뽕나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뽕나무와는 조금 다르다. 산에 자란다고 산뽕나무이며 열매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뽕나무의 오디와는 크기 차이가 많이 나다.
4월~5월에 꽃이 피어서 6월이면 열매가 익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의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어주는 고마운 나무이다. 검은 열매로 손이랑 입이 붉게 물들 때쯤이면 울퉁불퉁 놓여진 자잣성을 감싸면 빨간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에선 ‘보리탈’이라고 하는 ‘줄딸기’다. 보리가 익어 밭에서 보리를 베다가 돌담에 걸쳐지듯 주렁주렁 빨갛게 익은 딸기를 따 먹었다고 ‘보리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탈’은 제주어로 딸기를 말한다.
흔희 말하는 산딸기에는 종류가 아주 많다. 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줄기마다 하얀꽃이 큼직막하게 피는 장딸기를 시작으로 줄딸기, 복분자, 멍석딸기, 멍덕딸기, 검은딸기, 산딸기 등등 겨울이 되면 겨울딸기까지 산에서 만나는 딸기는 사계절 내내 숲속 친구들의 고마운 간식거리가 되어준다. 줄줄이 늘어진 딸기는 아직 덜 익어 신맛이 강하다. 나무 밑둥을 감싸며 지천에 깔려있는 딸기 밭은 아쉽게도 바라면 보고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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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나무 | 산뽕나무 | 산수국 |
잣성길 따라 황토길 옆으로 청보라색을 살짝살짝 보이며 장마를 기다리는 산수국이 가로수를 만들고 있다. 옛어른들은 산수국이 피면 장마가 시작되고 장마가 끝나면 산수국이 진다고 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6월 중순이면 장마가 시작되듯 산수국도 파랗게 붉게 하얗게 색을 달리하며 화려하게 피었다가 7월 어느날부터 지겨운 비가 그치고 햇볕이 뜨거워지면 어느새 지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이렇듯 자연은 서로 무언의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 늘 신기하고 대견하다. 산수국은 꽃색이 토양의 성질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띠는데 제주도 옛어른들은 그 달라지는 색을 보고 ‘도체비(도깨비)꽃’이라고 불렀다.
삼나무와 큰 교목들 사이 사이 넓은 잎아래 대롱대롱 매달려서 영국의 귀족머리를 한 것 같은 신기한 꽃을 피우는 ‘박쥐나무’를 만났다. 넓은 잎이 박쥐의 날개를 닮았다고 ‘박쥐나무’라고 한다는데 하얀 꽃잎이 돌돌 말려 올라가서 노란 꽃술이 길게 내려와 있는 모습이 특이해서 유심히 보게 된다. 나무아래 초본들 중에 옷의 쪽빛을 내는 ‘산쪽풀도’ 보일 듯 말듯 작은 꽃을 피우고 그 사이 길쭉하게 자란 천남성은 벌써 수정이 끝나서 열매를 맺고 있다. 천남성은 환경과 때에 따라서 스스로 암,수가 바뀌면서 자란다고 한다. 종족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절약이 대단하다.
하얀나비들이 초록 잎 위에 떼로 앉아 있는 착각을 할 정도로 가지가 부러질 듯 피어있는 ‘산딸나무’에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다. 열매가 딸기처럼 생겼다고 ‘산딸나무’인데 딸기 열매와는 또 다른 맛을 가져서 먹을 것이 귀했던 때는 많이 따 먹었다고 한다. 꽃은 두상화(머리모양)로 아주 작게 피는데 그 꽃을 4개의 하얀 포(苞)가 쌓고 있어 그 포가 꽃처럼 보인다. 꽃이 너무 작아 곤충들을 유인하기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똑똑한 것 같다. 이렇게 매개체를 유인하기 위해 위장하는 식물들은 종종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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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쪽풀 | 줄딸기 | 다래꽃 |
벌들이 좋아하는 때죽나무도 흐드러지게 피었던 꽃들을 우수수 떨어뜨려 지나는 이들에게 하얀 꽃길을 걷게 해준다. 때죽나무는 꽃이 아래로 종처럼 매달려 핀다고 해서 제주도에서는 ‘종낭’이라고 부른다. 줄기가 검다고 때죽이라고도 하고 가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수많은 열매(종자껍질)가 스님들이 떼로 모여 있는 것 같아 ‘떼중나무’라고 부르다가 때죽이 되었다고도 하고 잎과 열매에 있는 에고사포닌이라는 성분이 작은 물고기를 때로 기절시켰다고 해서 때죽나무라고 하기도 한다. 비누가 귀한 시절에는 열매와 잎을 찧어서 비누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줄기를 띠로 엮어 빗물을 받아 정수하는데도 썼다고 하니 참으로 유용한 식물이다.
숲이 주는 고마운 선물들을 온 몸으로 느끼며 걷다보면 어느덧 잣성길이 끝나고 있다. 오름을 오르지 않고 뒤돌아 걸었던 길 다시 돌아 오다보면 갈 때 보지 못했던 식물들이 또 보이게 된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 올 때 보았네”(고은 시인의 그꽃 중) 숲은 참 좋다. 특히 제주의 숲에는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