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기상 느끼게 하는 웅장함과 거친 면모 갖고 있어
숲따라 길따라②왕이메오름
남자의 기상 느끼게 하는 웅장함과 거친 면모 갖고 있어
언제나처럼 입춘이 지나면 막바지 한파에 온 섬이 꽁꽁 얼어붙는 날에는 한겨울보다 더욱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 올해는 유래 없는 폭설로 일주일동안 제주 섬이 하얀 눈에 덮여 섬을 찾은 관광객들까지 난민으로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봄의 문턱에서 눈이 오면 야생화를 찾아다니는 사진쟁이들은 카메라를 메고 마음 설레며 집을 나선다. 얼음처럼 차가운 하얀 눈을 뚫고 피어나는 설중화를 만나기 위해서다. 제주도에는 이른 봄의 기운을 전하는 전령사인 야생화들이 여기저기서 급하게 고개를 내밀지만 제대로 된 눈 속에 피는 꽃을 만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리고 특히 야생화를 찍는 사람들은 조금만 지나면 흐드러지게 만나게 되는 꽃이라도 누구보다 먼저 빨리 만나 앵글에 담는 지에 많은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고 발 빠르게 움직이곤 한다. 그런 부지런함이 있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귀한 야생화를 감상하는 호사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늘은 나 역시 설중화의 기대를 가지고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왕이메 오름으로 길을 나섰다.
눈밭에 발이 시려도 찾은 곳이 서귀포시 안덕면 소재의 ‘왕이메’ 오름이다. 탐라국 삼신왕(고, 양, 부)이 백성들을 위하여 3일동안 기도를 했다고 해서 오름 이름에 ‘왕’자가 들어간 유일한 오름이다.
표고는 612.4m이나 비고는 92m인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다. 하지만 오름이 품고 있는 분화구는 깊이가 101.4m이고 둘레는 3,655m의 거대하고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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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겨울나무들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분화구는 그 웅장함이 더욱 발길을 재촉하는데 가다보면 보호대를 설치해 놓은 수직동굴을 2개 만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놓았다는 깊이 15m의 진지동굴이다. 잠시 숙연함에 발길을 멈춰 동굴 입구에 무성하게 자란 양치류식물들에 눈인사만 하고 분화구로 내려가면 또 다시 분화구의 크기에 입이 다물 수가 없다.
교래리 ‘산굼부리’에 비교해서 제2의 산굼부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 둘레가 장관이다. 중앙에는 작년에 피었던 억새들이 한파에 그 기세가 꺾여 있고 능선 아래쪽은 그늘이 져서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많이 밟은 길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니 하얀 눈 위 노란 꽃망울이 나를 보고 웃는다. 복수초다! 육지에 있는 복수초와는 달리 잎이 많이 갈라졌다고 해서 ‘세복수초’다. 차디찬 눈을 뚫고 여린 꽃잎을 세상에 내보내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 모습에 애처롭기도 하지만 앙증맞은 모습이 너무 예쁘다. 눈속에서 피는 연꽃을 닮았다고 ‘설연화’라고도 한다는 노란 복수초가 올해는 나에게 멋진 행운을 가져다 줄 거 같다. 목적을 가지고 왔지만 굳이 복수초를 만나지 못했어도 오름 한바퀴 돌고 간다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 일상이 즐거웠을 것이다.
분화구를 다시 올라가서 삼나무숲길을 따라 내려가게 되면 영화에서나 본 듯한 양갈래로 갈라진 웅장한 삼나무 숲길에 하얀 눈이 배경을 더하면 나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만날 때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왕이메 오름은 오름의 형태나 식생이 모두 단조롭지만 들어가는 입구에서 억새개활지를 지나 자연림의 숲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 느끼는 감동과 깊은 숲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힐링하며 제주오름의 멋을 느끼는 분화구와 앙증맞고 예쁜 야생화를 만나는 행운도 얻고 영화의 주인공도 될 수 있는 오름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힘찬 기상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노란 복수초가 있는 왕이메오름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정봉숙‧제주숲해설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