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종료코너/숲이야기

남자의 기상 느끼게 하는 웅장함과 거친 면모 갖고 있어

제주한라병원 2016. 3. 3. 09:32

숲따라 길따라②왕이메오름

남자의 기상 느끼게 하는 웅장함과 거친 면모 갖고 있어




언제나처럼 입춘이 지나면 막바지 한파에 온 섬이 꽁꽁 얼어붙는 날에는 한겨울보다 더욱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 올해는 유래 없는 폭설로 일주일동안 제주 섬이 하얀 눈에 덮여 섬을 찾은 관광객들까지 난민으로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봄의 문턱에서 눈이 오면 야생화를 찾아다니는 사진쟁이들은 카메라를 메고 마음 설레며 집을 나선다. 얼음처럼 차가운 하얀 눈을 뚫고 피어나는 설중화를 만나기 위해서다. 제주도에는 이른 봄의 기운을 전하는 전령사인 야생화들이 여기저기서 급하게 고개를 내밀지만 제대로 된 눈 속에 피는 꽃을 만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리고 특히 야생화를 찍는 사람들은 조금만 지나면 흐드러지게 만나게 되는 꽃이라도 누구보다 먼저 빨리 만나 앵글에 담는 지에 많은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고 발 빠르게 움직이곤 한다. 그런 부지런함이 있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귀한 야생화를 감상하는 호사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늘은 나 역시 설중화의 기대를 가지고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왕이메 오름으로 길을 나섰다.

눈밭에 발이 시려도 찾은 곳이 서귀포시 안덕면 소재의 ‘왕이메’ 오름이다. 탐라국 삼신왕(고, 양, 부)이 백성들을 위하여 3일동안 기도를 했다고 해서 오름 이름에 ‘왕’자가 들어간 유일한 오름이다.

표고는 612.4m이나 비고는 92m인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다. 하지만 오름이 품고 있는 분화구는 깊이가 101.4m이고 둘레는 3,655m의 거대하고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한라산이 어머니의 산이라 제주의 오름들도 대부분 여인의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반면 왕이메오름은 올라가보면 이름에서도 느껴지지만 남자의 기상을 느끼게 하는 웅장함과 거침을 고루 가지고 있는 오름이다. 오름 입구는 서부산업도로에서 오른쪽 화전마을 이정표를 따라 내려가면 굴다리를 지나 화려한 골프장을 지나서 한참을 가다보면 오른쪽에 푯말이 나온다. 굴다리에서 왕이메 입구까지 도로가 잘 되어 있지만 골프장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고즈넉이 걷기 좋은 길이었는데 이제는 차로 휙 지나오지만 늘 아쉬움이 큰 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입구에 들어서 잠시 숨이 차오르기 시작 할 정도의 오르막길을 지나면 억새 개활지가 한 눈에 펼쳐진다. 가을에는 억새들의 왈츠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개활지 앞에 넓게 펼쳐진 오름이 진짜 왕이메 오름이다. 순간 내가 설문대할망의 넓은 팔을 가진 것처럼 오름을 두 팔 안에 담아 본다. 눈을 감고 안으면 내 품에 들어올 듯하다. 완만하게 뻗은 능선이 다정하게 와 닿는다. 억새사이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오름 숲 입구에 들어선다. 여름에는 울창한 푸르름에 더위를 식혀 주었을 낙엽활엽수들이 앙상한 가지만 남고 봄을 기다리며 찾는 이들의 온기에 길을 열어준다. 조심히 내딛는 발아래 나보다 먼저 눈길에 길을 안내하는 동글동글 노루의 발자국이다. 추운 눈속에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 다녔을 노루가 눈앞에 그려져 살짝 옆으로 발을 옮겨본다. 큰 눈이 다 녹고 다시 시작된 눈길이라 등산로를 쉽게 찾아 올라갈 수 있었다. 숲을 이루고 있는 주종인 나무들은 서어나무, 팥배나무, 쥐똥나무, 산딸나무, 솔비나무 등이며 사이사이 짙은 향을 가진 상산나무가 자연림을 이루고 있다. 힘들이지 않고 오르다보면 능선의 완만한 길을 따라 조릿대가 눈의 무게에 힘겨운 듯 살짝 길을 덮고 있다. 잎은 말라버린 청미래덩굴의 붉은 열매가 아직 남아서 겨울 산을 찾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하얀 눈속에 지난 가을의 흔적과 눈맞추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올라가게 된다. 오름 정상에 오르면 누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서쪽으로 펼쳐지는 시원한 오름 군락들의 풍광과 살짝 돌아서면 한라산 정상의 웅장함이 코앞에 와 있는 듯하다. 또한 발아래는 거대한 분화구의 둘레에 입이 쩍 벌어지게 된다. 작은 몸체에 이렇게 거대한 분화를 품고 있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제주 오름은 아무리 작아도 그 오름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동, 서, 남, 북, 아침, 저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우리에게 보여주는 오름은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작고 큰 감동을 주는 것이 오름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시간날 때마다 오름을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지역마다 마을마다 오름 하나 끼고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이런 제주에 사는 우리들은 늘 행운아라는 생각을 한다.


 

 

정상의 따뜻한 햇살에 분화구의 눈이 다 녹아버릴 것 같아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삼나무와 소나무군락을 만나게 된다.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서 위로 웃자라 큰바람에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나무들이 눈에 많이 띈다. 자연은 스스로 복원하는 능력이 있기에 다니기 좀 불편해도 그냥 놔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황량한 겨울나무들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분화구는 그 웅장함이 더욱 발길을 재촉하는데 가다보면 보호대를 설치해 놓은 수직동굴을 2개 만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놓았다는 깊이 15m의 진지동굴이다. 잠시 숙연함에 발길을 멈춰 동굴 입구에 무성하게 자란 양치류식물들에 눈인사만 하고 분화구로 내려가면 또 다시 분화구의 크기에 입이 다물 수가 없다.

교래리 ‘산굼부리’에 비교해서 제2의 산굼부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 둘레가 장관이다. 중앙에는 작년에 피었던 억새들이 한파에 그 기세가 꺾여 있고 능선 아래쪽은 그늘이 져서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많이 밟은 길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니 하얀 눈 위 노란 꽃망울이 나를 보고 웃는다. 복수초다! 육지에 있는 복수초와는 달리 잎이 많이 갈라졌다고 해서 ‘세복수초’다. 차디찬 눈을 뚫고 여린 꽃잎을 세상에 내보내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 모습에 애처롭기도 하지만 앙증맞은 모습이 너무 예쁘다. 눈속에서 피는 연꽃을 닮았다고 ‘설연화’라고도 한다는 노란 복수초가 올해는 나에게 멋진 행운을 가져다 줄 거 같다. 목적을 가지고 왔지만 굳이 복수초를 만나지 못했어도 오름 한바퀴 돌고 간다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 일상이 즐거웠을 것이다.

분화구를 다시 올라가서 삼나무숲길을 따라 내려가게 되면 영화에서나 본 듯한 양갈래로 갈라진 웅장한 삼나무 숲길에 하얀 눈이 배경을 더하면 나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만날 때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왕이메 오름은 오름의 형태나 식생이 모두 단조롭지만 들어가는 입구에서 억새개활지를 지나 자연림의 숲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 느끼는 감동과 깊은 숲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힐링하며 제주오름의 멋을 느끼는 분화구와 앙증맞고 예쁜 야생화를 만나는 행운도 얻고 영화의 주인공도 될 수 있는 오름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힘찬 기상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노란 복수초가 있는 왕이메오름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정봉숙‧제주숲해설사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