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데메테르는 딸이 없을땐 곡식 돌보지 않는데…

제주한라병원 2015. 7. 24. 17:11
역사 속 세상만사 - 모신(母神) 이야기 Ⅱ-

데메테르는 딸이 없을땐 곡식 돌보지 않는데…


지난 호에서는 대모신 가이아를 중심으로 한 모신(母神)과 우라노스, 크로노스 다음으로 올림포스의 왕좌를 차지한 제우스에 이르러서 신화속 가부장제 사회가 자리잡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데메테르 여신도 가이아만큼 숭배받는 신이었다. (로마인들은 이 여신을 케레스라고  불렀다) 데메테르는 곡식의 성장과 농경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그리스인들은 가장 오래된 출산의 여신 중 하나인 데메테르를 제우스의 누이로 만들었다. 데메테르가 인간인 이아시온을 사랑하게 되어 세 번 갈아엎은 밭에서 그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는 이야기는 그리스 이전 시대 농경생산의 기술을 짐작케 한다. (그녀와 이아시온 사이에서 풍요와 부의 신 플루토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저승세계의 신 하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이야기에는 자연의 생산 사이클, 즉 계절의 생성이 담겨 있다. 페르세포네가 납치될 때 가이아는 소녀의 주위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게 했다. 그녀가 감탄하면서 꽃들을 만져보려고 다가가자 대지가 갈라지고 이 틈으로 하데스가 소녀를 납치해 간 것이다.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그리스 방방곡곡을 헤매 다닌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도움으로 딸의 행방을 알게 된 여신은 하데스와 제우스에게 딸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데스가 이 요구에 응하지 않자 데메테르는 올림포스에 있는 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또 그녀는 곡식들의 성장을 돌보지 않아 세계를 기근에 빠지게 했다. 인간들이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게 될까 우려한 제우스는 자신과 데메테르의 어머니인 레아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결국 레아는 하데스가 1년의 1/3동안만 페르세포네와 함께 지내고, 나머지 2/3기간은 그녀를 양보하는 중재안을 냈다. 그리하여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와 함께 지내는 그 기간은 자연의 생산활동이 중지되는 겨울이 되었고, 페르세포네와 그녀의 어머니는 나머지 두 계절동안 들판의 생산 과정을 돌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계절을 셋으로 구분했다)


또 다른 모신으로 프리기아라는 소아시아 지방의 여신인 키벨레가 있다. 산신들의 어머니신으로 알려져 있고, 소아시아 전역에서 숭배되었으며 주로 풍요의 신으로 치는데 그리스인들은 레아와 동일시했다. 이 여신은 산속의 동굴에 살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사자가 그 뒤를 따른다고 한다. 키벨레에게는 아티스라는 젊은 애인이 있었다. 그는 이 정열적인 여신 때문에 성적 불능상태가 된 후 일찍 죽고 만다. 초기에는 키벨레를 위한 제의에서 모신을 대신하는 여사제의 애인이 들판에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한 후 제물로 바쳐졌다.


소아시아가 로마에 정복되었을 때, 이 여신은 정복자들의 신화 속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기원전 204년, 프리기아의 어떤 여성 예언자가 키벨레 여신으로부터 “나를 로마로 데리고 가라”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키벨레의 신상은 로마의 전리품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역땅 로마로 건너가게 된다.
여신의 신전은 현재의 바티칸 자리에 세워졌는데 로마인들은 키벨레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피정복민이 신봉하던 신은 대개 잊혀지기 쉬운데 키벨레는 대단히 예외적이었다.


로마에서 키벨레는 ‘아우구스트’(크게 되는 자), ‘아르마’(교육하는 자), ‘산크티스시마’(가장 성스러운 자) 등의 별칭을 부여받았고 여러 황제들이 키벨레를 제국 최고의 신으로 받들었다. 그 중 아우구스투스는 키벨레의 신전 정면에 궁전을 짓고, 자신의 아내를 화신으로 여길 정도로 열렬한 신자였다고 한다. 또한 율리아누스 황제는 키벨레를 모든 신들의 어머니로 생각할 만큼 적극적인 신자였다.


키벨레 신앙은 4세기까지 계속되었지만,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던 기독교 세력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키벨레는 신들의 어머니가 아닌 데몬(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 악마나 귀신 등으로도 해석됨)의 어머니로 강등되었으며, 그녀의 신전도 파괴되어 그 자리에는 성 베드로 성당이 들어섰다. 키벨레에 대한 비판은 중세 때의 ‘마녀 사냥’에도 영향을 끼쳤다. 키벨레의 별명 중 ‘안타이아’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키벨레가 대지의 거인 안타이오스를 낳았다는 신화에서 기인한다. 안타이오스는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살해당하는 악의 세력으로 그는 어머니의 신체, 즉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천하무적이었다.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를 공중에 들어올려서야 죽일 수 있었다.


중세 기독교는 이 신화와 ‘키벨레=데몬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절묘하게 활용했다. 악마의 사도인 마녀가 여러 가지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대지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로잡은 마녀를 땅에 발을 딛지 못하도록 커다란 바구니 속에 집어넣어 감금했었는데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화 속 모신이었던 키벨레가 종교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데몬의 어머니, 그리고 급기야는 마녀들에게 힘을 주는 부정적 지위로까지 강등된 것을 보면 신화와 역사는 결코 동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