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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자식들간 싸움 끝에 모계사회 막 내려

제주한라병원 2015. 6. 29. 08:58

역사 속 세상만사 - 모신(母神) 이야기 Ⅰ-
‘가이아’의 자식들간 싸움 끝에 모계사회 막 내려


지난달 임태주 작가의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유산처럼 물려주신 ‘아들에게 주는 편지’를 소개해 드렸다. 거기에 이어서 신화속에서 등장하는 어머니 신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스신화에는 가이아, 데메테르, 키벨레,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헤라 등 다양한 모신이 등장한다.

  
모신(母神)들은 신화시대 이전부터 지중해권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아마 하나의 대모신(大母神)이 여러 형태로 숭배되었을 것이다. 모신은 모체(母體) 뿐만 아니라 농경지와 가축들의 생산성을 상징하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매년 모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의가 거행되었다. 들판에는 곡식이 알차게 열리고 어미 가축들이 새끼를 배고 여자들이 임신하는 생산의 풍성한 순환 과정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에 정성껏 올린 희생 제의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풍성한 자연의 생산과 순환이 올해에도 반복되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가부장적 사회가 되고 나서는 모신들의 중심적 위치가 예전처럼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신화에는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오기 전 발칸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모신들을 숭배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이 이곳에 진출하기 전인 신석기 시대에 씨족의 구성원들은 큰 움막에 모여 살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씨족 구성원의 기준은 모계 혈통에 따랐으므로 부계 혈통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소위 모계사회다.) 반면 발칸반도 남부에 이주하기 전까지 유목민이던 그리스인들은 정착 후에도 유목민 특유의 가부장제 사회구조를 유지했다. 가축과 농경지는 가족 소유였고, 이 가족의 우두머리는 그 집안의 아버지였다. 가족의 재산은 아버지로부터 아들과 사위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에, 누가 자신의 아들과 손자인지를 분명히 가릴 수 있게 하기 위해 가장들은 아내와 딸들의 정조를 매우 중요시했다.(바로 가부장제 사회다.)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에 대한 신화는 태초부터 모신들이 남신들보다 먼저 있었다는 인식이 신화 저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이아는 사랑이 지닌 생산력을 뜻하는 에로스와 더불어 태초에 카오스로부터 가장 먼저 생겨난 신이다. 가이아는 하늘 우라노스를 만들어내고 그와 결합해 12 티탄(그중 막내가 크로노스)과, 외눈박이 거신(巨神) 키클롭스 3형제, 그리고 손이 백 개인 거신(巨神)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를 낳았다. 우라노스는 비와 훈풍을 내려 이 대지의 어머니에게 생식의 씨를 뿌렸지만 그의 후손들 중 경쟁자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가이아의 자궁을 막아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를 시켜 아버지를 거세시키고 그 권력을 빼앗도록 한다. 이때 거세된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떨어진 피가 대지에 떨어져 기간테스라는 거인족이 태어난다. 크로노스는 자신이 우라노스를 폐하고 권력을 잡자 형제괴물인 헤카톤케이레스, 키클롭스를 지하세계 타르타로스에 다시 감금하고, 우라노스의 피를 받아 새로 태어난 형제인 기간테스들도 지하세계에 가두어 버렸다.


우라노스가 폐위된 후, 레아는 크로노스의 아내가 되었고 레아와 크로노스 사이에는 막내인 제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헤스티아 · 데메테르 · 헤라 · 하데스 · 포세이돈 등 총 5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런데 크로노스는 이들 5명이 태어날 때마다 꿀꺽 삼키는 악행을 행하였다. 이는 자신의 부모인 우라노스와 가이아로부터 자신도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자식에 의해 폐위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고, 이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크로노스가 누이 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삼켜 버리자 가이아는 딸 레아를 도와 그녀의 막내아들 제우스 대신에 바위덩이를 아이로 위장해 크로노스에게 내주도록 해서 제우스를 구한다. 성인이 된 제우스는 첫 번째 아내 메티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아버지(크로노스)의 몸안에서 해방시켰다. 크로노스와 다른 티탄들은 제우스와 그 형제들과 10년간의 거대한 전쟁(티타노마키아)을 벌이는데, 이때 크로노스가 패하여 지하세계에 감금되었고 제우스의 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제우스는 메티스가 낳은 아들이 다시 자신의 왕위를 빼앗게 되리라는 가이아의 예언을 듣고서 아내 메티스를 삼켜버린다. 결국 가이아는 아들 기간테스들을 사주하여 제우스와 올림포스 신들의 지배권을 뒤집어엎으려 시도하지만 기간테스들의 패배로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제우스의 의해 마침내 모신의 지배가 끝나고 신들의 세계에도 가부장적 질서가 확립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다 보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식을 해치는 비정한 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낫들고 달려드는 패륜적 자식’ 등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에 꽤 놀라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신들의 계보를 완성하기 위한 신화적 이야기이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조부모, 부모, 자녀, 손주 등의 관계를 기준으로 이해하면 곤란하겠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신화 속에서 모계 중심 세계가 어떻게 가부장제 쪽으로 이동해 갔는가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모신인 가이아의 신전을 숭배하였으며, 이 여신의 신탁에 특별한 비중을 부여했다. 태초 이래 모든 사건들을 알고 있는 이 여신보다 현명한 이는 아무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