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고 쓸모없는 것은 담아두지 말고 날려 보내라”
역사 속 세상만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은 담아두지 말고 날려 보내라”
5월은 참 여러 ‘날’이 있는 달이다. 첫날은 ‘메이데이’라고 하는 근로자의 날,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 18일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25일은 석가탄신일 등... 그중 어버이날이 있어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생각들이 다른 계절보다 유난히 우리 마음을 스쳐간다.
얼마전 우연한 기회에 임태주 작가의 모친께서 아들에게 남기고 가신 글을 접하게 되었다. 많은 교육을 받지는 않은 듯한 작가의 어머니께서 글쓰기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아들에게 글로써 당신 인생에 대한 회고와 사랑, 당부를 쉽고 따뜻하게 적어서 남기셨다. 때마침 5월이어서인지 더욱 아릿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록이 천지를 물들이는 따뜻한 봄날에 고향과 어머니의 향기가 떠오를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일부를 옮긴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중략)......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중략)......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중략)......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 임태주 작가의 모친께서 아들에게 남긴 편지 中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60달러에 불과했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불과 수십년만에 세계경제 규모 10위권 국가로 성장해오기까지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각박한 살림살이를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이끌어 오신 우리의 어머니들... 임 작가 모친의 삶과 헌신이 우리 어머니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멀리 사는 가족이 이웃사촌보다 못할 때도 있다는데, 어머니께 전화 한 통, 편지 한 장을 통해 가슴속 사랑과 고마움을 좀 더 자주 표현해야겠다는 반성이 스스로를 덮쳐오는 봄날 오후다. (다음 호에서는 신화속 어머니, 즉 母神 이야기를 살펴보자)
<참고>
※ 임태주 : 시인이자 산문집 ‘이 미친 그리움’을 펴낸 작가. SNS에서 ‘고춧대를 태우며’라는 글로 탁월한 묘사를 보여준 바 있다. 그의 글은 현학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서 읽기 편하고 쉽다. 일상을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낯설지 않게 풀어낸다. ‘고춧대를 태우며’의 끝은 대략 이러했다. ‘마른 고추씨의 영혼을 품은 연기들이 하늘로 올라 알알이 박혀 별이 되었다. 겨울의 밤이 매서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