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향하는 마음, 사랑의 마법보다 강해
- 오디세우스의 귀향 -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 사랑의 마법보다 강해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는 그의 소설 <향수(鄕愁)>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초에 신화가 있었다. 위대한 신은 그 옛날 인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게르만 사람의 영혼 속에 살며 날마다 신화를 지어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 곧 향수(鄕愁)가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신화’를 짓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리라.
설 명절이 있는 이맘때면 해마다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서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이럴 즈음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에 떠오를 법한 시가 있다. 바로 정지용 시인의 ‘향수’다. 잠시 떠올려 보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생략)
참으로 정겨운 고향과 가족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양의 그리스 신화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실함이 ‘신화를 써내려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트로이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오디세우스는 전쟁을 마친 후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는 고향 이타카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바다의 지배자 포세이돈이 그의 함대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아이아이에 섬에 상륙했을 때 그에게는 단 한 척의 배만 남아있었다.
이 섬에는 마법의 요정 키르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로 아름다운 머릿결과 뛰어난 화술을 지니고 있었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깊숙한 만에 배를 정박했지만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렸다. 사슴 사냥으로 겨우 허기를 면한 그의 일행은 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제비를 뽑아 원정탐험대를 결성한 그들은, 에우릴로코스의 지휘아래 인원의 절반 정도가 원정에 나섰다. 오디세우스는 다른 절반의 대원들과 함께 배에 남았다.
얼마 안 되어 원정대는 돌로 지어진 키르케의 집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노래 부르며, 베틀 앞에 앉아 일하고 있는 그녀의 집에서 늑대들과 사자들이 온순하고 평화롭게 그들을 맞이했다. 곧 키르케도 나와 지친 방문객들에게 보릿가루, 꿀, 치즈, 포도주 등을 섞어 만든 스프요리를 내놓았다. 하지만 친절한 접대도 잠시, 키르케가 이 스프에 마법의 독초를 넣었기 때문에 식사가 끝날 무렵 이들은 돼지로 변해 돼지우리에 갇히고 만다.
다행히 이 위기를 모면한 에우릴로코스는 여기서 빠져나와 오디세우스에게 이 모든 일을 보고했다. 오디세우스는 단호히 칼을 뽑아 들었다. 불행에 뛰어들지 말라며 말리는 에우릴로코스를 뿌리치고 그는 마녀(?)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총애했던 신들이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려고 보내준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와 마주쳤다. 그는 키르케가 마법을 부린다는 것과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또 신비한 약초를 가져가라고 건네주었다. 모든 일은 헤르메스가 미리 말해준 대로였고, 신비한 약초 덕분에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먹인 마법 음료와 마법 회초리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오디세우스가 칼을 들어 베려하자 그녀는 그의 무릎을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내 마법에 꿈쩍도 하지 않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신은 틀림없이 오디세우스시군요. 예전에 헤르메스가 당신이 트로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타고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칼을 거두시고 함께 침실로 올라가시지요. 우리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기로 해요.”
영웅 오디세우스조차도 이 새로운 사랑의 마법이 가진 유혹의 힘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심스레 그녀가 앞으로는 결코 그에게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노라는 맹세를 받아둔다. 그들이 잠자리를 함께하며 사랑을 나눈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키르케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그와 사랑의 기쁨을 나눈 후 그녀는 그의 목욕 시중을 들고 몸에 향유를 발라주며, 그에게 귀한 옷을 입히고 훌륭한 음식을 내오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심지어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근심에 젖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그 이유를 물어볼 만큼 섬세하고 자상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일행을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돼지우리에서 그들을 데려와 마법의 약초로 쓰다듬자 그들은 즉시 전보다 더 젊고 건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키르케가 오디세우스 일행 모두를 손님으로 받아들이자 이들도 지난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항해하는 일도 모조리 잊을 정도로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자기 통제력을 되찾는다. 다음번 잠자리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과 자신의 일행들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노라고 그녀가 첫 사랑을 나눌 때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일깨워주었다.
키르케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슬픔에 빠졌지만, 고향을 향한 마음이 사랑의 마법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 고향의 위대한 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