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일 없고 실패한 염경엽 감독과 1등만 했지만 외로운 류중일 감독
별 볼일 없고 실패한 염경엽 감독과 1등만 했지만 외로운 류중일 감독
서울종합운동장 잠실야구장은 우리나라 야구장에 대표적인 구장입니다. 잠실야구장은 1982년 7월 16일 개장식을 갖고 기념 야구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해 3월 27일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개막식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지만 잠실구장 기념대회는 당시 인기 있었던 고교야구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해 고교대회에서 우승한 경북고, 부산고, 군산상고, 천안북일고 등 4개 고교가 초청받아 개장기념대회를 연 것입니다. 결승전은 7월 17일 열렸는데 경북고-부산고의 대결로 이루어졌습니다. 부산고는 연장 10회초 김종석의 2루타 등으로 2점을 빼내 극적으로 경북고를 4-3으로 꺾고 우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야구장 중 가장 넓은 잠실야구장 1호 홈런은 경북고의 4번타자인 류중일이 부산고 에이스 김종석으로부터 6회에 솔로포를 터트려 기록했습니다.
류중일은 경북고 시절부터 스타플레이어였습니다. 한양대학을 거쳐 1986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87년부터는 우리나라의 최고 유격수로 인정 받았습니다. 수비 잘하고 잘 때리고, 걸음이 빨라 국제대회마다 대표팀에 발탁됐으며 1987년, 1991년에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상을 수상하고 1999년 시즌을 마치고 13년만에 선수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그는 2000년부터 삼성의 주루코치로 일하고 2011년에는 선동렬 감독 후임으로 삼성 사령탑에 앉아 삼성 한 팀에서만 뛰고 있는 엘리트입니다.
류중일(52)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첫 해부터 삼성 라이온즈를 정규 시즌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리 우승하는 것을 통합 우승이라고 하는데 류중일 감독은 2011년부터 2012년, 2013년, 2014년에 통합 우승을 거두어 4년 연속 통합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과거 해태 타이거즈가 1986년~1989년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86년과 87년, 89년 리그에서는 2위를 차지하고 최종 우승을 따내 차이가 납니다. 류 감독은 2011년 처음에 3년간 연봉 2억원에 계약하고 지난 해 재계약하면서 3년간 계약금 6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21억원에 계약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최고의 성적을 올리는데 대해 일부에서는 “삼성 선수들이 다른 팀보다 워낙 전력이 좋은데다 그룹 지원이 다른 구단보다 좋아서 그런 결과가 난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는 뛰어난 선수들이 많고 구단의 지원도 최고여서 1903년에 시작한 월드시리즈에서 27번이나 우승했지만 최근 2009년 우승 이후에는 지난 해까지 5년간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감독의 스타일이 전통적으로 우리 야구에서는 혹독한 훈련과 엄격한 관리, 통제 등을 통해 선수단을 지배하는 감독이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류중일 감독은 선수들에게 자율과 책임감을 강조하고 선수들이 스스로 깨우치고 경기에 나설 수 있도록 만듭니다. ‘형님 리더십’을 앞세워 선수단과 소통을 통해 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줄 아는 지도자여서 성공한 것입니다.
류중일 감독은 “경기에 이기면 코치들하고 악수하고 선수들하고 하이파이브 하는 순간만 기쁘다. 우승을 해도 헹가래 받는 순간만 기쁘다. 그러나 우승팀 감독은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 연속 우승을 할수록 그 부담은 더 커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프로는 1등만 살아남는다. 2011년 첫 번째 우승을 한 다음 시즌 초반에 성적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코치들에게 싫은 소리를 좀 했다. 그런데 어느 코치가 ‘작년에 했는데 또 하려고 하나’라고 불평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래서 그 코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우승 후 지도자의 느슨함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감독은 외로운 자리다. 특히 가족이 더 힘들 것이다. 누구누구의 아내, 자식으로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그것이 가족에게 가장 미안하다. 감독이 되면서 주위의 친구도 다 떨어졌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연락이 오지 않는다. 정말 외로울 때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 혼자 숙소에서 술을 마시거나 어쩌다 단장 혹은 입단 동기인 김정수 매니저와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전부다. 외롭지만 그것이 숙명이다”고 일상생활의 고충을 토로합니다.
본인은 체력관리 방식을 “홈경기를 하면 매일 오전에 MTB(산악자전거)를 타고 집 부근을 한 시간씩 돈다. 그때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시간이다. 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면 아무도 날 몰라본다. ‘당연한 우승’이라는 소리가 가장 듣기 싫다. 타 팀과 비교했을 때 항상 모자란 것이 보인다. 그래서 걱정이고 또 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다.”고 말합니다.
류중일 감독이 통합 우승을 4년 연속해 인기가 올랐으나 지난 해 시즌이 끝나고 가장 화제에 오른 감독은 준우승팀 넥센 히어로즈의 염경엽(47)감독입니다.
프로야구 감독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해군 제독과 함께 남성이 선망하는 3대 직업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최고의 선수 출신이 맡아왔습니다. 하지만 염경엽 감독은 선수 시절 성적이 형편없었던 유일한 사령탑입니다. 이런 배경에 2등을 하면 프로세계에서는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지만 염경엽 감독은 지난 해 야구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시즌 후에도 빛이 났습니다. 감독 데뷔 2년 만에 팀을 준우승시킨 염경엽 감독은 작년 시즌을 마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야구를 하면서 감독은 꿈도 꾸지 못했고, 최고로 올라가면 수석코치라고 생각했다"며 "실패를 경험한 뒤에야 '이렇게 존재감 없이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노력한 결과, 운이 좋아 감독이 됐고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도움으로 준우승까지 했다"고 회상합니다.
염 감독을 광주 서석초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광주일고에 진학해서 동기인 김기태 KIA 감독과 2년 후배 이종범 해설위원과 함께 야구를 했는데 항상 뒤졌다고 말합니다. 학교 공부는 열심히 해서 고려대에 입학하고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하자마자 주전 내야수를 꿰찬 유망주였지만, 10년간 타격은 1할9푼5리, 홈런은 5개를 기록하고 은퇴해 현대 유니콘스 구단 프런트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프로 선수로 별 볼일 없었던 염경엽 감독은 프런트에서도 처음에는 운영팀 말단 대리로 6년간 험한 일을 했습니다. 다시 유니폼을 입고 지도자로 일하고 싶었던 염 감독은 마음을 고쳐먹고 수첩에 선수들의 특징을 메모하며 공부하기 시작해 스카우트 일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당시 현대 김용휘 단장은 “집념이 강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대단한 친구”라면서 코치직을 약속했습니다. 결국 2006년 11월에 3년 계약으로 코치의 꿈을 이뤘지만, 한 시즌 뒤 현대 구단이 해체됐고. 두산, SK, LG 3개 구단에서 프런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자리가 나면 코치를 시켜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LG로 가 스카우트팀 차장과 운영팀장을 거쳐 2009년 수비코치가 됐습니다. 이후 넥센 작전코치를 거쳐 2012년 10월 넥센 감독에 취임했습니다.
염 감독은 "코치 시절 선배 지도자들을 연구했다. 당시 준비한 것을 감독이 돼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2013년에 넥센을 창단 이후 처음으로 팀을 4강에 진출 시키고 지난 해는 한국시리즈까지 올렸습니다. 지난 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2승4패로 패한 후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능력 부족’을 자책했습니다.
그는 "아직 나는 초짜 감독이고, 내가 준비한 것으로는 50%밖에 메우지 못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염 감독은 “어쩌면 타율 1할대의 선수 시절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염 감독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수국사(서울 은평구 소재) 주지스님인 호산 스님을 찾아간다. 나를 다스려야 다른 사람도 다스릴 수 있는 거니까. 절에서 인내와 기다림을 배운다. 또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고 일상생활을 이야기합니다.
4년 연속 통합 우승의 금자탑을 세운 류중일 삼성 감독이나 선수로 실패했다가 사령탑으로 성공하고 홈런왕 박병호, 한 시즌 200안타의 서건창을 발굴한 염경엽 감독은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빼어난 인물이지만 그들이 성공하기까지 노력과 역경은 우리가 배워야 할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