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속에서 ‘아름다움’ 찾기 위해 신들의 힘 빌려
- 신화 속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 -
‘무질서’속에서 ‘아름다움’ 찾기 위해 신들의 힘 빌려
최근 극장가를 크게 흔들어놓은 영화 한 편이 화제다. 우리말로 하자면 ‘별과 별 사이, 항성 간의..’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황폐해져가는 지구를 벗어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나서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웜홀이나 중력 등 영화를 감싸안고 있는 물리학적 지식도 재미있지만 낯설고 두려운 광활한 우주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도전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8년 제작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작년에 개봉한 <그래비티>같은 영화들에서도 그 맥락이 꾸준히 이어지는, 무한한 우주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던지는 본원적 질문 앞에 관객들은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 태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리스인들은 이를 ‘카오스’, 즉 무질서라고 생각했다. 카오스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와는 다른 의미로 이전과 이후,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앞과 뒤가 없으며 옳고 그름을 구분하게 해주는 규칙도 없다. 하지만 세계가 진정한 의미의 세계가 되려면 질서가 생겨나야 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들은 산과 들, 강과 바다, 동물과 식물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그 안에 인간의 도시가 세워지며 자연질서를 잘 반영하는 법과 질서가 정립되는 세계를 원했다.
그러나 어떤 질서도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그들은 정치적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인간들과 도시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벌였고, 이는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카오스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러기 위해 신들의 힘에서 답을 구했다.
태초 카오스에 ‘가이아’라고 불리는 땅과 지하세계, 그리고 에로스 즉 사랑이 생겨났다. 또 카오스의 자식들인 어둠과 밤이 있었고 그 후에 우라노스, 즉 하늘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최초의 질서가 생겨났다. 즉 하늘, 땅, 지하세계라고 하는 위와 아래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에는 생명들이 탄생했다. 위대한 창조의 힘을 지닌 에로스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하늘과 땅은 사랑의 힘으로 서로 결합하여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띤 생명체인 티탄족 남녀들을 낳았다. 그들 중에는 최초의 태양신 하이페리온과 모신 레아, 그리고 그 남편인 크로노스가 있었다. 크로노스는 티탄족 중에서 가장 젊고 영리한 신이었다.
하늘신 우라노스는 아내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자식들인 티탄들을 가부장적으로 지배했다. 그는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가이아의 자궁을 틀어막고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들과 100개의 팔을 지닌 헤카톤케이르들을 지하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렸다.남편의 이런 처사에 분개한 가이아는 돌로 낫을 만들어 막내아들 크로노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크로노스는 우라노스가 가이아 곁에서 잠들 때를 기다려 낫으로 그를 거세해버렸다.
우라노스가 지배자의 위치에서 쫓겨나자 모든 것이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즉시 새로운 지배체제를 수립했다. 그는 자신이 해방시켰던 키클롭스들과 헤카톤케이르들을 타르타로스로 다시 감금했다. 그는 또한 형제들에게 각자의 지배 영역을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통치에 협력하게 만들었다.
크로노스의 반란과 더불어 세계 질서에는 세대의 계승과 역사의 시간이라고 하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이 시간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크로노스조차도 그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크로노스는 아내 레아가 아이를 낳는대로 모두 삼켜버렸다.
“시간은 자신의 자식을 삼켜버린다”는 현대의 격언은 그리스인들에게도 친숙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이 말은 하나의 언어유희이기도 했다.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Chronos’는 그 발음이 크로노스(Kronos)와 거의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고전시대 이후의 그리스인들에게 시간은 하늘과 땅의 아들이자 그 이후에 생겨난 모든 신들의 조상인 시조신의 하나였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통치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자식을 삼켜버린 죗값을 받은 것인지 결국 아들 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크로노스가 이 막내아들을 삼켜버리지 못했던 건, 제우스가 태어났을 때 레아가 아이 대신에 포대기에 싼 돌을 크로노스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무사히 자라난 제우스는 몰래 그에게 토하는 약을 먹였다. 이렇게 해서 크로노스 뱃속의 형제들을 해방시킨 제우스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싸움을 시작한다. 올림포스의 신들과 티탄족 사이에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져 이제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태초의 카오스가 다시 도래할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결국 티탄족들은 다시 타르타로스에 감금되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질서가 얼마나 오래 갈지... 카오스에 대한 불안을 항상 지니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진지하게 종교적 제의를 거행했다. 농경의 풍작과 가축의 다산이 계속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매년 새로이 그에 대해 기원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