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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법정이 ‘복수의 악순환’에 종지부 찍어

제주한라병원 2014. 7. 1. 10:38

- 복수의 화신, 에리니에스 -
아테네 법정이 ‘복수의 악순환’에 종지부 찍어

 
로마에서는 ‘푸리아’라고도 불리던 ‘에리니에스’는 무서운 여자의 모습을 한 복수의 여신들(알렉토, 티시포네, 메가이라 등)이다. 이들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뒤쫓아 다닌다. 항상 여럿이 함께 몰려다니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이름은 별 의미가 없지만 에리니에스 중 가장 알려진 이름은 <메가이라>다. 화내는 여자를 뜻하는 독일어 ‘Megäre’ 는 여기서 유래했다.


에리니에스는, 법 질서가 가족 단위에 제한되어 있어 피의 복수가 거의 유일한 사법절차였던 신화시대의 여신들이었다. 남의 손에 살해당한 가족의 복수를 미루는 사람은 에리니에스에게 시달림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부친이나 모친을 살해함으로써 신성한 가족의 유대를 끊어놓은 자 역시 반드시 에리니에스의 손에 찢겨 죽게 된다. 결국 에리니에스는 복수의 정신과 존속 살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신격화된 것인 셈이다. 이들은 분노에 의해 불려나와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힌다. 이 끔찍한 여신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이들을 미화하여 ‘친절한 여인들’이란 뜻으로 에우메니데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을 가져오기 때문에 모든 공동체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서로 다른 가족 사이에, 혹은 한 가족 내에서 어느 한쪽이 피의 복수를 시작하면 다른 한쪽도 그것을 앙갚음할 수밖에 없으며, 이 끔찍한 폭력은 세대를 거쳐 이어져 내려간다. 오늘날에도 국가 권력이 미약하여 마피아적 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곳에서는 피의 복수가 끊임없이 자행된다. 이러한 복수의 악순환은 강력한 국가의 힘에 의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국가가 판결권을 갖고, 폭력에 대한 보복을 대신해야만 한다.

아테네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대가족적이고 씨족적인 사회 구조는 점차 국가적 법 질서로 대체되어 갔다. 이 시기에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에우메니데스』가 탄생했다. 이 비극은 에리니에스가 이 도시국가의 수호여신 아테나에 의해 힘을 잃게 되는 것을 테마로 하고 있다.


아이스킬로스는 피의 복수라는 원칙이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신화적 사례인 오레스테스의 경우를 소재로 삼았다. 오레스테스는 그의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했다. 이것은 에리니에스들의 법에 의거한 것이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모의하여 트로이에서 돌아온 그녀의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지 델포이의 신탁에 자문을 구했다. 델포이의 신 아폴론은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죽음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신탁을 내렸다. 그는 누이 엘렉트라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그의 정부에 대한 피의 복수를 행했다. 여기에는 아가멤논의 왕위를 찬탈한 아이기스토스가 엘렉트라를 욕보이고 그녀를 궁전에서 내쫓았던 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에리니에스에게 시달리지 않기 위해 복수를 해야만 했던 이 오누이는 이제 모친 살해범이 되어 또다시 에리니에스의 가혹한 추적을 받게 되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인 것이다.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는 고향에서 추방되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방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겪었다. 주범 오레스테스는 에리니에스의 저주를 받아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델포이까지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아폴론 신에게 다시 신탁을 간구했다. 아폴론은 그에게 아테네로 가서 그곳의 법정인 아레오파고스의 판결을 받으라는 신탁을 내렸다. 아레오파고스의 현명한 재판관들도 이 까다로운 사건을 놓고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표결 끝에 결국 아테나 여신의 표가 판결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지혜의 여신은 이들의 죄를 사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법정은 복수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복수에 대한 법적 권리와 의무가 가족으로부터 법정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리니에스가 완전히 실권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오레스테스를 광기에서 풀어주는 것을 거부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오레스테스는 어려운 과제를 해내야만 했다. 그 과제는 신비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아르테미스 신상을 타우리스에서 빼앗아 아테네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정 모험은 지극히 행복하게 끝났다. 타우리스에서 그는 누나 이피게네이아를 만났다.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이 희생제물로 바친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이피게네이아의 도움으로 신상을 훔쳐낸 후 이들은 함께 그리스로 되돌아왔다. 그사이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의 절친한 친구 필라데스와 결혼을 했다. 오레스테스는 미케네의 왕이 되어 많은 영웅적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을 뒤쫓던 에리니에스는 복수의 화신이라는 오명을 떨쳐버리고, 친절한 여인들이라는 뜻의 온화한 에우메니데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