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일제강점기 건물 표피 핥기의 틀을 깨고 건축에 사상을 입히다

제주한라병원 2014. 2. 27. 13:32

일제강점기 건물 표피 핥기의 틀을 깨고 건축에 사상을 입히다

제주 건축 따라가기(3)


제주의 근대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이번엔 그 인물을 따라가며 제주의 근대건축도 아울러 찾아보겠다.

 

 

▲ 동양극장

건축가 박진후, 그리고 김한섭

박진후와 김한섭. 이들 모두에게 건축가라는 이름을 달기는 좀 그렇다. 둘 모두 일제강점기 때 건축을 배운 이들이었으나 표현방식, 즉 작품성을 거론한다면 김한섭에 좀 더 무게감이 실린다.


박진후, 그의 대표작품은 제주에 없다. 지난 2012년 12월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도심에 있던 옛 제주시청사가 그의 작품이다. 제주시청사의 파괴는 행정의 무관심과 무지가 빚어낸 하나의 사건이었다.


박진후는 일제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들어가기 힘들다는 학교에 들어간다. 바로 경성고등공업학교(나중에 서울대 공대가 됨)이다. 이 학교에서 공부를 한 한국인은 극소수였으며, 대부분은 일본인 자녀들이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지난 1922년 개교이래 광복 때까지 이 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400여명 가운데 한국인은 59명이에 불과했다. 박진후가 바로 그 59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진후 그 분에 대한 이력은 찾기 힘들다. 박진후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오바야시구미’라는 기업에 들어간다. 그 기업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들을 강제징용해 이코마터널을 건설한 기업이다. 오바야시구미는 2012년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파탑을 설치한 기업이며, 달로 향하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국인을 강제징용에 투입한 그런 기업으로, 여기에서 박진후는 일을 한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온 엘리트였으나 박진후 그 분의 제주에서의 활동은 미약하다. 옛 제주시청사와 몇몇 건물을 설계하기는 했으나 그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에 비해 건축가 김한섭의 활약은 남다르다. 김한섭은 동양극장(1965년) 등을 설계했다. 동양극장은 당시로는 보기 드믄 전면유리인 커튼월 공법과 영사실을 독립시키는 등 조형적으로도 뛰어난 건물이다. 당시 전국에서도 드문 다기능 복합건물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더욱이 김한섭 개인으로서는 고향 제주에서의 첫 작품이다.


김한섭은 1938년 송정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하급 기술자로 파견된다. 그러나 하급기술자는 그의 자존심을 건들게 된다.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학력 극복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 유학시절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이다. 그 때 오영섭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오영섭은 자긍심이 강한 인물로, 김한섭에게 사상적인 버팀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한섭이라는 인물을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도록 계기를 준 건 1952년이다. 그 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건축가 3명이 해외로 떠나게 된다. 김중업이 르 꼬르뷔지에 밑으로, 김수근이 일본으로, 김한섭도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에 오른다. 김한섭은 일본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인 마에가와 구니오를 만나고, 그 때의 충격이 그의 건축에 녹아든다.

 

 

▲하니크라운호텔

제주의 모던건축과 김태식

지금이야 눈을 사로잡는 건축물이 많다. 그런데 1960년대 세상에 이슈를 던진 건축물이 하나 만들어진다. 바로 하니크라운호텔(옛 제주관광호텔)이다. 이 건축물은 김태식이 설계했으며, 1963년 세상에 빛을 본다.


이 건축물은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선과 면의 불규칙적인 조화가 만들어낸 건축물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은 옛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고전건축의 경직을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다. 달리 말하면 ‘건축미학’이라는 표현도 괜찮을 듯하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건축이란 게 서양의 것이며,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부터 넘어온 게 사실이다. 어쩌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일제 때 기술을 배우고 그걸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건축의 표피만 배웠을 뿐 내면을 답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니크라운호텔은 그렇지 않다. 점, 선, 면 등으로 형태를 표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모더니즘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

하니크라운호텔이 만들어진 배경도 재미있다. 재일동포 사업가인 김평진씨가 1961년 재일제주개발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고향돕기 사업을 전개한다. 이 당시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면담을 하게 되고, 관광지 제주에 숙박시설이 없다는 얘기들이 오고간다. 그러자 김평진 회장이 “그럼 내가 하겠소”라고 응대하고, 제주 첫 민간호텔이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제주시민회관

1년 후에 김태식의 설계로 만들어진 제주시민회관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제주에서는 첫 철골조 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외관도 마찬가지이다.


하니크라운호텔과 제주시민회관을 제주에 던져두고 간 건축가 김태식은 해방 후 첫 건축사사무소를 등록한 사람으로 이름을 새기고 있다. 건축사사무소 1호이다. 1945년엔 조선건축사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이력은 건설업자 위주인 건설 풍토에 대한 일종의 반기로, 작가성을 띠닌 이들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런 중요한 위치를 김태식이라는 건축가가 차지했으니, 그의 작품이 빛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김태식이 이끈 조선건축사협회는 한국건축작가협회(1957년)를 거쳐, 1959년엔 한국건축가협회로 거듭난다.